본문 바로가기
리뷰모음 - Readingworks/소설·비소설·인문·

역사와 미술이 조화된 우리나라 팩션의 맛깔한 한상차림!

by Richboy 2008. 9. 28.

 

바람의 화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정명 (밀리언하우스, 2008년)
상세보기

 

역사와 미술이 조화된 우리나라 팩션의 맛깔한 한상차림!
 
 지구가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두려운 예언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컴퓨터가 혼란에 빠진다는 밀레니엄버그는 2000년을 넘으면서 1900년대의 달력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세상은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가장 찾기 쉽고 알리기 쉬운 것은 조상들이 남긴 책 속에서 찾았다. 바로 '역사歷史'다.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면서 문학계를 사로잡은 것은 [해리포터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을 필루로 하는 환타지 장르와 [다빈치 코드]를 시작으로 펼쳐진 히스토리 팩션 장르. 여기서 두번째로 거론된 팩션이야기를 한다.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인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 팩션(Faction)이란 장르의 소설로는 미국에서만 7백만 부 이상 판매되었으며, 독일,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지에서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한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가 단연 지금까지는 최고의 화제꺼리다.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작품을 설명하는데 흔히들 '빅뱅'과 '블록버스터'라 표현을 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루브르 박물관과 각종 건축물에 대한 풍부한 지식으로 무장한 소설의 인기가 판매량을 끌어올렸고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한 사이였으며 예수가 마리아에게 자신의 사후, 교회를 이끌어가도록 했다는 내용은 뜨거운 종교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우리도 함께 서양의 그것에 함께 열광하다보니 '남의 잔치에 흥돋우는 격'이라, 그래서 될 말인가? 우리의 작가들이 [다빈치 코드]라는 '낫' 앞에서 'ㄱ 기역자字'를 찾았다. 바로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나라를 설명하면서 가장 머리에 세우는 것이 바로 '반만년半萬年', 즉 5,000년의 역사가 아니던가? 21세기를 '지식문화산업'이 중심이 되는 시대임을 이야기한 미래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스토리텔링'즉 풍부한 이야기를 '컨텐츠'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몇년 째 '아시아 전역'을 뒤흔든 한류韓流의 영향도 바로 우리 외엔 세상의 어느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뭉근한 정情 이라는 정서'와 그들은 상상할 수 조차 없어 '판타지'와 같은 '우리의 역사이야기'였던 것을 보면, 이젠 한 나라의 정서와 이야기가 '확실한 돈을 가져다 주는 산업'으로 흘러거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듯 하다.
 
  이러한 '문화산업'이 우리나라에서 계속해서 순조롭게 태동되고 있다. 서양에서 만들어지고 히트한 것만을 골라서 제공하는 역할만 하던 과거와는 달리 그동안 외국의 하청으로 단련된 경험과 새로 개발된 기술, 그리고 세상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를 엮어 새로운 '문화컨텐츠'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조상들의 기록인 역사를 비롯해, 허구의 소설을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 대중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만화도 그에 동참해 새로운 문화장르로 탈바꿈을 하고 있으니, 원소스 멀티 유즈One Sauce -Multi Use로 소비자를 감동시키는 '컬처비즈의 시대'에 제대로 순풍을 탄 느낌이다. 
 
 최근에 이러한 거대한 흐름에 동참을 한 소설이 있다. 치밀한 복선과 방대한 역사적 지식을 통해 한글 속에 숨겨둔 세종대와의 비밀코드를 타이틀로 한국형 팩션의 장을 열었던 [뿌리 깊은 나무]의 저자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 이 지난 주부터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데, 예전의 이야기가 의술을 말하고, 음식을 말했다면, 이번에는 미술 그리고 미술가를 말한다. 그리고 드라마가 시작부터 재미가 쏠쏠하다. 이야기의 전부를 알면, 드라마가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얼른 집어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정말 재미있고, 흥미로운 소설 [바람의 화원]이다.  
 
 

 
 우선 주인공을 소개하자. 본관 김해(金海), 자 사능(士能), 호 단원(檀園)인 김홍도, 그는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이 된 뒤 1781년(정조 5년)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려 도화서 최고의 영애인 어용화사가 되었다. 1790년 수원 용주사(龍珠寺) 대웅전에 [삼세여래후불탱화(三世如來後佛幀畵)]를 그렸고, 1795년(정19년) 중인의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벼슬직인 정6품 연풍현감(延豊縣監)이 되었지만 곧 사임한다. 이듬해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삽화를 그렸으며, 1797년 정부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삽화를 그렸다. 산수화·인물화·신선화(神仙畵)·, 불화(佛畵), ·풍속화에 모두 능하였고,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며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명실상부한 조선 최고의 화원인 단원 김홍도. 그리고 조선후기의 풍속화가,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 화가로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며 주로 도회지 양반의 풍류 생활과 부녀자의 풍습, 그리고 남녀 간의 애정을 풍자적인 필치로 묘사했던 혜원 신윤복 이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아쉽게도 조선 최고의 화원 김홍도에 필적한 혜원 신윤복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도화서에서 춘화를 그려 파직 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그에 대한 어떠한 신뢰할만한 자료가 없는 게 실정이다. 그의 성별의 모호함과, 사라쿠란 이름의 일본 화인이 혜원이라는 풍문까지 그에 대한 궁금증을 중폭시킨다. 강한 필력으로 서민들의 삶을 담았던 단원 , 섬세한 묘사와 풍작정인 필지로 조선 최고의 화원으로 이름을 널리 펼쳤던 단원의 그림과 극과 극을 이루며 여성적인 섬세한 표현과 묘사의 새로운 화풍의 또 다른 천재화원 혜원 신윤복. 이 소설은 그 사라진 한 천재 아니 두 천재의 이야기가 이정명의 글을 통해 화려하게 세상으로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3대가 도화서 화원이었던 집안 신한평의 둘째로 태어나 형 신영복과 함께 도화서 화원이 된 혜원 신윤복. 철저하게 규정된 도화서 양식에서의 틀에 박힌 그림에 반항이라도 하듯 여인을 그림의 중심으로 한 춘화를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 날 위기에 처한다. 당시 여성은 남성의 주변 배경으로만 그려졌던 양식을 뒤집어 버린 그의 그림은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줬지만 사회적 인정을 받기엔 너무 앞선 그림 이었다. 그리고 같은 하늘 아래 두 명의 천재를 내린 하늘의 뜻을 안 듯 그의 천재성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김홍도. 그는 혼이 담겨진 혜원의 그림을 누구보다 인정 하지만 양식을 거부하고 규율을 무너뜨리며 마음이 가는대로 가는 그의 그림이 화원이 될 수 없는 그림임을 또한 알고 있었다.
 
  화원이 되지 못한 그의 그림은 천재가 아닌 미치광이의 그림에 지나지 않았던 당시의 사회적 규약이 그들의 자유로움을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혜원의 섬세하면서도 정밀한 묘사와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움 화풍은 조선의 부흥기를 이끌며 예약을 사랑했던 또 한명의 천재 정조의 눈에 띄어 김홍도와 함께 어진화사를 준비하기에 이른다. 도화서의 눈엣가시 같았던 두 천재화가를 정조가 어진화사에 참여할 화원으로 뽑히게 된 또 다른 이유를 정조를 통해 듣게 된다. 10년 전 두 화원이 살해 된 사건의 재수사와 함께 뒤주에 갇혀 처참한 죽음을 당했던 정현세자의 어진을 찾는 일이 그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혹과 어진을 찾아가며 밝혀지는 진실, 그리고 그 속에 단원과 혜원의 갈등, 아픈 상처를 지닌 또 한명의 천재 정조, 동생을 위해 화원이 되기를 포기하며 색을 연구하는 단청쟁이 영복, 이루지 못할 사랑의 여인 예기 정향, 살해당한 김홍도의 스승 강수항과 친구 서징, 그리고 재물을 바탕으로 권세를 휘어잡은 거상 김조년, 제자로서 경쟁자로서, 그리고 한명의 인간으로서 혜원을 향했던 김홍도의 애정과 열정이 하나의 하늘아래 내려진 두 천재화원의 작품과 함께 이정명의 손에 의해 긴박하게 살아난다.
 
 
 
 
  책속에 수록된 30여 편의 신윤복과 김홍도의 작품은 책을 이끌어 가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교과서를 통해 익히 보아 왔기에 눈에 많이 익은 그들의 작품은 작가의 손에 의해 다시 그려진 것이다. 단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뿐 아니라 그들의 혼과 삶이 담겨진 반짝이는 보석으로 오늘날까지 빛을 발했다. 같은 주제로 두 화인이 그린 극명하게 다른 두 작품을 보며 그들이 느낀 삶의 애환과 그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그들의 삶을 느낄 수 있다. 짧은 역사기록과 남겨진 미술작품을 통해 미술가들을 그려보고 추억함이 이 소설을 읽는 백미라 할 수 있다. 역사소설로서 가지기 힘든 긴박감과 탄탄한 구성, 그리고 치밀하게 계산된 스토리 전개는 읽는 이로 하여금 한 편의 영화와 같은 영상을 뇌리에 떠오르게 만든다.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영화로도 손색없는 소재였다.
 
  이제 드라마를 통해 책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영상과 모습들을 비교해 볼 차례다. 팩션임을 알린 소설을 놓고 다시 영상으로 재구성한 것에 대해 '사실과 거짓'을 논하기는 마치 영화를 보면서 스토리에 몰두하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 동원된 엑스트라의 급여'를 계산기로 계산하는 제작자의 입장일 게다. 원작을 읽으며 내가 상상한 이야기가 늘 최고인 법, 드라마는 영상을 즐기고, 연기자의 표정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드라마를 백배 즐기고 싶다면 소설을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