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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모음 - Readingworks/인문

인생 사용 설명서 - 김홍신에게 장총찬의 부활을 요구한다

by Richboy 2009. 7. 18.

 

 

 

 

 

 

 

김홍신에게 장총찬의 부활을 요구한다

 

  1989년 대동제를 앞둔 어느 봄날, 모 대학의 교양 국어 수업시간이었다. 강의 도중에 한 남학생이 일어나 국어교수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했다. “이 강의실에 제가 사랑하는 여학생이 있습니다. 그녀에게 제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좌중은 어수선해졌지만, 교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남학생은 준비한 꽃다발 한아름을 들고 여학생에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만 담았을 뿐 차마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친구들의 도움으로 오늘 이렇게 당신에게 꽃을 바칩니다. 제 마음을 담을 이 꽃다발을 받아 주십시오.” 처음에 놀란 여학생은 창피해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못하고 있다가 꽃다발을 받으면서 “고맙습니다.” 말했다. 순간 여학생 옆에 있던 학생들이 일어나 파티용 폭죽을 터뜨리고 꽃가루를 날리며 환호했다. 남학생의 친구들이었다. 수업을 듣던 학생들도 환호를 하며 축하를 해주었다. 남학생도 창피해져서 제 자리에 앉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 길지 않은 삶을 살진 않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내 인생에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었고, 또 다른 학생들에게도 사랑을 할 때 필요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알려준 것 같습니다. 난 젊은 여러분이 부러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큰 배움을 얻었는데 이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어떻게 수업을 할 수 있으며, 여러분은 어떻게 수업을 들을 수 있습니까? 오늘은 휴강합시다. 그리고 사랑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두 학생에게 A학점을 줄까 합니다.”

 

  한동안 그 교실에 학교가 떠나갈 듯 큰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이 이야기는 오래 전 어느 캠퍼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안타깝게도 난 그 자리에 없었다. 홀아비 쉰 내 푹푹 풍겨나는 3학년 교실에서 ‘대입 모의고사’로 국어 문제나 풀고 있었을 것이다. 다음 해 그 대학의 새내기가 되어 학교 앞 2층에 있는 ‘학사주점’에서 1년 전 그 날 수업을 들었던 선배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래서 그들이 누구였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다만 한 명 교수가 누구였는지는 또렷이 기억한다. 그 교수의 이름은 김홍신이었다. 그의 말이 장미꽃 한다발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열 다섯 살이었던가? 내가 김홍신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인간시장’이라는 소설을 통해서였다. 부조리로 얼룩진 80년대의 대한민국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악으로 깡으로 밀어부친 젊은이 장총찬의 활약을 다룬 소설이 ‘인간시장’이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정치인, 사이비 교주, 인신매매단, 심지어는 일본으로 건너가 야쿠자를 혼내주는 장총찬의 활약상을 책으로 읽으면서 난 ‘소설’이라는 장르, 특히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 ‘물건’인가를 그 때 알았던 것 같다. 나중에 진유영이라는 장총찬에 딱 어울리는 배우가 주연을 맡아 영화를 찍었고, 그 후에도 몇 번 드라마로 제작된 적이 있는 멋진 소설이다. 선배들이 기억하는 ‘국어시간의 그 사건’이 어느 교수님 시간이었다면 난 아마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인간시장>의 소설가 김홍신이 내가 다니는 대학의 교수였다는 사실을 ‘묘한 인연’으로 느끼며 놀랐기에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책 <인생사용설명서>를 만난을 때 그 날을 또 기억한 것처럼.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사십니까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구와 함께 하겠습니까

지금 괴로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겠습니까

 

  이 책은 소설가 김홍신이 강연, 강의, 대담, 글 등을 통해 나누었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다. 크게 일곱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제시함으로써 나의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를 스스로 생각하도록 꾸미고 있다.

 

“하물며 가전제품 하나에도 사용설명서가 있는데, 우리 삶에 그 같은 지침을 왜 찾지 않는 걸까요? 단 한 번의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인생사용설명서를 갖춰야 합니다.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손꼽아봅시다.”

 

  건강, 웃음, 사랑, 행복 등 인생에서 중요하지만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한다.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들은 당연하다 여기고 늘 존재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당장은 하나뿐인 내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오늘 이 순간을 사는 것도 복됨을 알게 했다. 인생을 다시 관조하게 되는 질문과 답은 마음의 평화를 주기에,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해 기운을 차리기에 큰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라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직은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할 때가 아니다 싶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홍신을 인생을 논하는 노교수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모자람이 있기 때문이다. 독자로서 그를 더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글은 한참 뒤에나 봤음직한 글이 아닌게 하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올해로 예순 셋을 맞이한 그가 인생을 논하기가 새삼스럽진 않다. 하지만 항상 젊을 것만 같은 ‘장총찬’같은 그가 인생운운 하는 글을 읽자니 자못 서글퍼졌다. 그의 나이듦이 곧 그렇게 되어버린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던가. 기세등등한 문체를 자랑하던 그가 겸양어를 쓰는 모습도 그리 어울리지 않았다. 반가운 부분은 3장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였다.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알리고, 초강국이 되어버린 중국을 상대로 발해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민족적 자존심을 드높여야 한다는 그의 목소리는 대하역사소설 ‘대발해’의 그때를 보는 듯 했다. 무척이나 반가웠다. 소설가 김홍신은 아직 젊다. 그는 이런 수필보다는 소설로 만나고 싶다. 사상 유래없이 8년 연속 의정평가 1등을 한 국회의원으로서 보고 듣고 배운 세상이 얼마나 많겠는가? 모두 고스란히 토해놓길 바랄 뿐이다. 원래 ‘장총찬’의 이름은 ‘권총찬’이었던 것으로 안다. 군부독재시절에 태어난 소설의 운명은 제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이제 권총찬이 부활해서 오늘날의 부조리를 파헤쳐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