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모음 - Readingworks/독서법·글쓰기

책이 되어버린 남자 - 카프카의 ‘변신‘이 벌레라면, 이번엔 책이다!

by Richboy 2009. 11. 14.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음습하고 기기묘묘한 소설!

 

  벼룩시장의 어느 헌책방에서 한 여성이 이유없이 사망 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애서가 비블리 씨는 그녀가 지목했던 책을 훔쳐 나온다. ‘겉표지는 사라지고 없고 갈색 속표만 있는 클로스 제본술로 제작된 무두질한 가죽 같은 질감으로 된 손에 쥐기 딱 알맞아 보이는 책의 이름은 ’그 책Das Buch'다. 비블리 씨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을 꺼내어 훑어보기 시작한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는 시선을 고정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눈으로 활자들을 빨아들이던 그는 책에 홀리고 만다. 이제 그는 책이 되고, 책은 그가 되기 시작한다.

 

  알폰스 슈바이거르트의 소설 <책이 되어버린 남자Das Buch>(비채)는 기괴한 매력을 지닌 소설이다. 책을 사랑하는 애서가인 한 남자가 한 권의 낡은 책에 매료되어 푹 빠지더니 결국은 자신이 책이 되어버린다는 이야기는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가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에,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 그리고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의 갑충으로 변해버린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생각나게 한다. <변신>이 인간 실존의 허무와 절대 고독을 주제로 하고 있다면, <책이 되어버린 남자>는 책과 책에 관련된 사람들의 애정과 애증을 잘 표현한 소설이다.

 

 

 

  사람이 책이 된다는 설정은 흡사 판타지같지만, 책을 읽어보면 몇 번의 ‘작은 소름‘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판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구입하면서 ’책을 만난다‘고 말하고, 책을 읽으면서 책과 대화한다고, 이야기를 듣는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미리 사 놓고 미처 읽지 않은 책을 놓고 자신을 읽어달라고 눈치를 준다고 느끼고 있다. 한낱 책이거늘 구겨질까, 찢어질까, 젖을까, 얼룩질까 고이 모셔 놓는다. 나는 지금도 책을 사람 보듯 의인화하고 있다. 내가 비블리 씨가 된 듯 해서 오싹해진다. 그가 읽고 있던 책도 바로 ’그 책Das Buch'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름은 예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여행의 책>을 읽을 때 였다. 일반적으로 책이 저자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받아서 보여주는 가교 역할을 했었다면, <여행의 책>은 책 속에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들어 있었다. 저자는 스스로를 책이라고 말하며 독자인 내게 주문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과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말을 걸었다. 독자는 눈동자로 활자를 쫓으며 읽기만 하면 되는 여행인 셈이다. 글을 읽다 보면 그가 이끄는 대로 스스로 움직이는 경험이 시작된다. 유체이탈과 비슷한 상황으로 만들어져 내가 있는 장소에서 부웅 떠서는 천정과 지붕을 뚫고 책과 함께 하늘을 나는 경험을 한다. 책과 함께 불과 물 그리고 흙의 나라를 여행하고 무사히 제자리도 돌아와 안녕을 고하는 <여행의 책>을 읽으면서 책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독자가 책에 푸욱 빠져버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했다. <책이 되어버린 남자>는 독자인 내가 주인공인 ‘그 책’이 되어 나를 선택하는 사람들, 즉 애서가, 장서가, 책벌레, 책 수집광, 고서 수집가, 독서광, 작가, 편집자, 출판인, 제본업자, 비평가, 독자, 책에 미친 사람들을 경험하게 된다. 한 권의 손을 거쳐간 사람들의 행동과 책에 쓰인 내용을 접하면서 내뱉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이들에게 갖는 책의 애정과 애증을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 비블리 씨가 책으로 변하는 순간은 영화 <플라이>를 보는 듯 하고, 전체적으로 음습하고 어두운 분위기와 장면마다 책과 사람 이렇게 단 둘이 조우하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팀 버튼 감독의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연상케 했다. 고서적을 느끼게 하는 책 편집효과와 분위기를 잘 묘사한 ‘무슨‘의 그림들은 ’그 책‘을 더욱 실감나게 만들어준다. “서점에서 두 악마가 밀회를 갖는다. 하나는 쓰기의 악마요, 하나는 읽기의 악마다.” (요제프 니들러), “책, 곧 죽은 사람이 산사람이 가진 특권보다 우월한 권리를 행사한다.”(루돌프 폰 예링), "운명이란 바로 그대들이 지닌 책, 책은 저마다 운명을 품고 있으니"(오토 슈토에즐) 등 책의 중간마다 등장하는 독서에 대한 아포리즘을 만나는 것도 특별한 재미가 될 것이다.

 

  “만일 그 책을 손에 넣고 거의 끝까지 읽던 중인데, 즉 그 안에 담긴 내용을 건성을 대충 알아 가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집중이 되지를 않는다. 그래도 남은 문장들이 무슨 중요한 의미를 품은 것만 같아서 억지로 읽어 보지만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고, 활자들이 흐릿해지며 크기가 작아지다가 결국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도 왠지 책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다.” 이때가 바로 비블리 씨가 책이 되는 순간이다. 독서를 하면서 책에 자주 몰입되거나, 허리가 아프거나, 키가 줄어든 느낌이 있다면 비블리 씨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리고 책에 빠진 사람의 별명을 ‘책벌레’ 대신 ‘비블리 씨’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특별한 느낌의 기기묘묘한 소설, 책을 읽는 사람만을 위한 멋진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