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Some place../오늘의 책이 담긴 책상자

리치보이가 주목한 오늘의 책 - '책'(박맹호 자서전)

by Richboy 2013. 1. 5.

 

 

 

현재형 청춘, 박맹호 회장이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
 

『책: 박맹호 자서전』은 한 세대가 넘는 세월 이 나라 지식산업계의 거인으로 우리 시대 문화에 깊이와 무게를 더해 온 출판 그룹 민음사의 박맹호 회장의 자서전이다. 1966년 서울 청진동 옥탑방 한 칸에서 민음사를 창립한 이래, 문학과 인문학 출판에서 많은 업적을 쌓아 마침내 한국 최대의 단행본 출판사로 키워낸 저자가 충청북도 보은의 한 마을인 비룡소에서 시작해 책으로 쌓아 올린 평생을 돌이켜본다.

완성된 인간은 책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첫 책 《요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5000종이 넘는 양서를 출판하며 전문 출판의 길을 제시한 저자의 일생과 민음사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저자와 책의 만남이 빚어낸 강렬한 에피소드들이 담겨있다. 베스트셀러인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둘러싼 이야기, 다양한 작가들과의 인연, 김용옥, 최장조, 이강숙 등 신진 학자들과의 만남 등을 그리고 있으며 저자의 소설 《자유 풍속(自由風俗)》을 수록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박맹호 자서전 책』
한국 출판의 반세기를 말하다


사람은 누구나 평생에 한 번쯤은 ‘그 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키기보다 오직 미래를 창조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은 삶 자체로서만 답할 뿐 이에 대한 답을 흔히 후세의 몫으로 넘기곤 한다. 1966년 서울 청진동 옥탑방 한 칸에서 민음사를 창립한 이래, 문학과 인문학 출판에서 많은 업적을 쌓아 마침내 한국 최대의 단행본 출판사로 키워 낸 박맹호 회장이 그 질문에 답하면서 ‘책’이라는 과감한 제목의 자서전을 펴낸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그동안 “각계 명사들이 지나간 이야기를 털어놓는 지면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번번이 고사해 온 터여서 더욱 그렇다.

이 책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의 형식으로 씌었다. 1933년 생으로 올해 맞은 팔순이 한 계기가 되었고, 충청북도 보은의 한 마을인 비룡소에서 시작해 “책으로 쌓아 올린” 평생을 돌이키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박 회장이 답하고자 한 것은 “늘 위기가 아닌 적인 없”었던 한국 출판의 역사를 통해, 그 역사 속에서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던 민음사의 역정을 통해 오늘날 팽배해 있는 패배주의적 “출판 위기론”에 대한 대안적 통찰이다.

@‘완성된 인간’은 책 없이는 불가능하다. 출판 종사자들은 이러한 사명감을 갖고 꾸준히 책을 펴내서 독자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만날 하는 진부한 얘기 같지만, 이 점이야말로 변하지 않고, 앞으로도 쉽게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257쪽)@

인간은 책 없이 완성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출판인은 “새로운 필자를 발굴하고 새로운 책을 만들어 내면서 이 사회의 지성과 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맹호 회장은 스스로 일생을 통해 이 주장의 증거가 되었다. 첫 책 『요가』(1966)를 펴내면서 시작해 지금까지 5000종이 넘는 양서를 출판한 그의 인생을 배제하고 1970년대 이후 한국 출판의 역사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970년대 초 박 회장은 ‘세계 시인선’과 ‘오늘의 시인 총서’로 시집 출판 붐을 일으켜 오늘날 한국을 ‘시의 나라’로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한수산, 박영한, 이문열, 최승호, 조성기, 강석경, 이혜경, 이만교, 정미경 등 대형 신인을 발굴해 낸 ‘오늘의 작가상’과 신진 작가의 작품들을 과감하게 단행본으로 펴내 독서계에 일대 충격을 가져 온 ‘오늘의 작가 총서’를 통해 한국 문학 출판의 전범을 마련하고 단행본 출판 시대를 열었다. 또한 ‘이데아 총서’ ‘대우 학술 총서’ ‘일본의 현대 지성’ ‘현대 사상의 모험’ 등을 통해서 이전에는 교재 출판 수준에 대부분 머물렀던 인문학, 자연 과학 등 기초 학문 출판을 다양한 형태로 장려하고 정착하는 데 앞장섰다. 그 와중에 시집 판형을 개발하고 한글 가로쓰기를 본격 도입하는 등 한국 책 형식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고 북 디자이너 정병규와 힘을 합쳐서 책 장정과 광고의 역사를 개척해 나갔다. 1990년대 초에는 대중 출판의 시대를 맞아 편집부 직원이었던 이영준을 주간으로 발탁하여 문인 또는 교수가 아니라 편집자가 출판을 주도해 가도록 함으로써 ‘전문 편집자 시대’를 여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이후 비룡소, 황금가지, 사이언스북스 등 민음사의 계열 자회사를 통해 각각 어린이 책, 대중 문학, 과학 책 출판을 선도함으로써 전문 출판의 길을 제시했다.

“민음사의 궤적이 한국 출판의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역할은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할 만하다. 창립 이래 지금까지, 박 회장은 한국 출판이 부닥쳐 온 지속적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좋은 책을 내면 독자의 손에 들어가게 마련이라는 믿음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선견을 갖춘 저자를 발굴하고 끊임없는 출판 실험을 통해서 이를 적극적으로 세상에 알려 감으로써 출판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책의 세계를 확장해 왔다. 박 회장의 일생과 민음사의 역사를 더듬는 것은 단지 한 개인 또는 한 회사를 회고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위기에 빠진 출판에 강력한 시사점을 던지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이 책에는 박 회장과 책의 만남이 빚어낸 강렬한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실려 있다. 청소년 시절 그가 즐겨 읽고 감동에 빠졌던 『인간의 굴레에서』, 『1984』, 『밤으로의 긴 여로』, 『적과 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삼국지』, 『수호지』 등 동서양의 명작들은 문청 시절에는 ‘이런 작품을 쓰겠다’는 다짐으로, 출판 입문 이후에는 ‘이런 책들을 반드시 내 손으로 펴내겠다’는 형태로 가슴에 남아서, 수많은 시도 끝에 결국 40년이 흐른 뒤인 1998년에야 실현되어 최근 300권을 돌파한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 밖에도 《한국일보》 제1회 신춘문예에 소설로 당선될 뻔했으나 독재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취소되어 운명이 바뀐 이야기, 시인 고은과 만나서 의기투합해 출판 동지이자 평생의 우정을 계속한 이야기, 김현, 김치수 등 ‘문학과 지성’ 그룹과 함께 ‘세계 시인선’ ‘오늘의 시인 총서’ 등을 기획해 시집 열풍을 불러온 이야기, 정병규를 만나 그를 디자이너의 길로 이끌고 함께 한국 책 디자인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분투한 이야기, 건국 이래 최대의 베스트셀러인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둘러싼 이야기, 한수산, 박영한, 강석경, 하일지 등 작가들과의 인연, 김용옥, 최창조, 이강숙 등 신진 학자들과의 만남 등이 두루 실려 있어 흥미를 더한다.

대한출판문화협회를 둘러싼 이야기는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낸다. 1980년대 김경희(지식산업사), 김언호(한길사), 이기웅(열화당) 등 대표적 단행본 출판사 사장들과 함께 ‘수요회’를 이끄는 맏형이 되어 출판문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출판인 17인 선언?「출판문화의 발전을 위한 우리의 견해」’를 주도하고, 이후 단행본 출판사들의 열망을 안고 출협 회장 선거에 나섰다가 중정 등의 방해로 낙선한 뒤 세무 조사를 받아 회사가 존폐의 위기에 놓인 것은 박 회장이 입에 담기를 꺼려서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2005년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출협 회장에 당선되어 한국 출판의 미래를 열기 위해 분투하다가, 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대목에서는 숙연한 느낌이 든다.

이 책은 박맹호 회장의 또 다른 출발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박 회장은 영원한 현역이다. 그는 “오늘도 새벽에 평생 해 왔던 것처럼 집으로 배달되는 일간지들을 정독하고 출판사에 나갈 시간을 기다린다. 민음사는 물론 한국 출판을 위해서도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다. (중략) 출근할 때는 여전히 마음이 설렌다.”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 출판의 거대한 뿌리를 이루었다. 그 뿌리는 지금도 어마어마한 힘으로 물과 양분을 공급하면서 수많은 책들을 열매 맺게 하고 있다. 디지털과 모바일의 시대에 ‘책의 힘’이 궁금한 이들은 이 자서전에서 통찰과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만난 박맹호

“박맹호라는 아주 무서운 사람이 있는데 그를 만나서 굴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서울대 문리대 시절부터 쟁쟁한 소설가로 알려졌고 별명조차 그가 창작한 소설의 주인공 이름으로 불릴 정도였다.”(69쪽)_신동문

“발상에서 행동 사이에 거의 틈이 없다.”(70쪽)_고은

“문학을 주로 얘기하며 자주 어울리던 동기들 대부분은 릴케나 보들레르에 심취해 감상주의적 경향이 짙었다. 하지만 박맹호는 부친이 국회 의원이어서 그런지 정치와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현실 비판적이면서도 풍자적 글도 곧잘 쓰는 등 다른 동기들에 비하면 특이한 데가 있었다. 문학의 길을 접고 출판인의 삶을 살았지만, 문학을 계속했더라면 폭넓은 창작 활동을 하는 훌륭한 저자가 됐을 것이다. (중략) 젊은 시절 박맹호는 친구들을 먹이고 재우며 뒷바라지하는 일이 잦았다. 그는 휑한 표정에 어딘가 허점이 있어 보이지만, 캐 들어갈수록 속내가 깊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세속과 다투지 않으면서도 세속과의 게임에서 이긴 사람이다.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세력화를 도모하거나 파당을 만들지 않아 문단과 예술계와 학계의 수많은 사람의 의지처가 됐다. 그의 도움으로 책을 내고 필명을 알리고도 다른 출판사로 옮겨 가 안착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는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박맹호는 씨앗을 싹틔우고 이앙 전까지 길러 내는 묘판(苗板)과 같은 삶을 살아왔다.”(43, 44쪽)_이어령

“내가 박맹호 회장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3월 중순이었다. 당시 지방지 기자였던 내가 결근까지 하고 서울로 불려 와 박맹호 회장님을 만나고 통보받은 것은 당초 《세계의 문학》 봄호에 실리기로 했던 중편 「사람의 아들」이 여름호로 밀리게 되었다는 것과 그 이유였다. 「사람의 아들」이 여름호에 발표될 ‘오늘의 작가상’ 후보에 올라 심사에 들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그런 편집 위원들의 결정을 군더더기 없는 말과 담담한 표정으로 전하시던 박 회장님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청탁에 응한 원고를 문학상 응모작으로 바꾼 데는 하다못해 내 작품을 알아봐 주었다는 식의 호의적인 설명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깐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박맹호 회장님은 되잖은 번설이나 췌사에 엄격하셨던 것으로 이해한다.”(vi)_이문열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날씬한 느낌으로, 한 번도 기름기 밴 적 없는 박맹호 회장의 눈빛은 유난히 형형하다. 그 시선에 붙들리면 꼼짝 못한 채, 뭔가 거짓말을 했다가는 금세 들통 날 것 같은 유사 공포증을 느낀다. 그는 입을 다문 채 경청하는 태도로, 장황하게 변명과 설명을 뒤섞어 어물거리는 상대방을 만날라치면 말 중간에 잠시 한마디 의문문으로 되물어 상황을 종결시키기도 한다. 박 회장 자서전을 읽는 느낌은 그래서 기이하다. 언제나 상대방 얘기를 경청하는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놓다니, 퍽 놀라운 일이다.”(ix)_정은숙

 

◆ 평생 출판에 매진한 내적 동기는 무엇인가?

@고향 보은에서 정미업과 운수업을 크게 일으키고 건축업에까지 진출했던 부친은 불과 스무 살에 보은군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중략) 게다가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까지 낭랑하고 커서 아버지의 호령은 늘 사람을 주눅 들게 했다. 특히 내가 그랬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부친의 삶을 거부하고 그분 곁을 떠나려 했지 한 번도 아버지에게 순응하거나 손을 내민 적이 없다. 부친은 내가 당신 일을 이어받아 사업체도 꾸리고 정치판에도 뛰어들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한 나라의 문화를 만들어 간다는 자부심으로 부친의 바람과는 전혀 딴판인 출판에 매진했다. 부친은 나를 볼 때마다 “그까짓 책들 파지로 갖다 팔면 몇 푼이나 나오겠냐!” 하고 힐난하시곤 했다. 그럴수록 나는 출판에 더 열심히 매달렸다.(10쪽)@

1933년 충북 보은에서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박맹호는 어린 시절 말수 적고 소극적인 소년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자신의 동생들과 그 가솔까지 모두 거두어 먹여 살린 아버지는 ‘보은의 왕’으로 군림하며 온 식구들을 몰아붙이는 분이었다. 스무 살의 나이에 보은군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사업가로 성공한 아버지는 정치에 대한 야망도 커서 국회 의원 선거 때만 되면 모아 놓은 돈을 모두 쏟아부어 거의 빈털터리가 되다시피 하곤 했지만 곧 빈 곳간을 다시 채우는 능력 또한 출중했다.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하던 박맹호는 아버지가 출판에 대해 냉대를 하면 할수록 더욱 악착같이 출판에 매달렸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룩하여 그런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함께 존재했다. 그래서 그는 오늘에 이르러 “평생 아버지가 나를 냉정하게 대했던 게 오늘날의 나를 만들어 낸 근원적인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15쪽)라고 회상한다. 그렇게 카리스마로 군림한 아버지 옆에는 끝없이 참는 전형적인 인종의 여인인 어머니가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뒤란에 숨어서 호드기를 불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 온다. “너는 큰 사람이 된다더라.” 하며 아버지와는 반대로 가없는 격려와 믿음을 보여 주었던 어머니의 태도는 소년 박맹호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 “나는 책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책과 처음 만난 시기와 그 책은 무엇인가?

경복중학교 시절, 아버지의 냉대와 병약한 체질 때문에 어린 나이인데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아버지의 다그침에 못 이겨 서울에 있는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인데, 타지 생활은 무척이나 삭막하고 외로웠다. 사교성도 부족해 학교에 가도 선생님들이나 친구들과도 가깝게 지내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책과 음악이 유일한 인생의 멘토였다.
로맹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고 외롭고 우울한 자화상을 발견하며 위로를 받고 희망을 찾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통해 불굴의 정신을 배우고 펄 벅의 『대지』, 『밤으로의 긴 여로』, 『적과 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번안한 김내성의 『진주탑』 등에 심취했다. 조지 오웰의 『1984』처럼 인간의 자유와 사랑의 본질에 대해 여전히 일깨우는 작품을 통해 고전의 힘을 확인했다. 이처럼 서양 문학을 통해 인간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동양 작품을 통해서는 삶의 방법을 배웠다. 경복중학교를 오가는 길목의 삼각지 지하도 건너 로터리에 있던 ‘대동서점’은 그 시절 박맹호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는 공간이었다. 거기서 구입한 『삼국지』, 『수호지』, 『임꺽정』 등을 작품을 읽으며 현실에서 접해 보지 못했던 기쁨을 얻었다. “삶이 이렇게나 재미있고 살아 볼 만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윌 듀런트의 『철학 이야기』,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도 이 시절 읽은 책이다.

@이 시절에 읽었던 책들은 내 삶의 철학을 이루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어린 시절의 독서는 정말 중요하다. 독서야말로 인격 형성의 기초 공장 역할을 한다. 똑같은 책이라도 어려서 읽을 때 다르고 청년, 중년, 노년에 읽을 때 다른데, 이것이 책의 고유한 능력일 것이다. 나는 책을 통해 만들어졌고, 따라서 책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었다.(22쪽)@

◆ 소설가가 될 뻔했다가 출판으로 방향 전환을 하신 이유는?

1952년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문학은, 대학 시절은 물론이고 결혼 뒤 방황하다가 출판사를 차리기 전까지 청춘의 황금기를 장악한 절대적 존재였다. 하지만 대학을 지원할 때부터 문학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 마음에 영어나 좀 배워 보려고 영문과에 지원했지만 성적에 밀려 2지망인 불문과에 합격했다. 그러다 보니 본래 흥미가 없던 프랑스어 공부는 시들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소설 공부에만 매진했다. “인생의 작은 분기점들이 모여서 운명을 만들어 간다면, 내가 본래 바라던 영문과 대신에 불문과에 가게 된 것 역시 나중에 출판에 이르는 운명적인 과정이었다.” 국문학과의 이어령, 신동욱 등이 단짝 친구였으며, 청주고등학교에서부터 같이 대학에 진학한 남재희, 김덕주, 김동규, 원춘희, 김석환, 그리고 동기 유재식과 1년 후배 원윤수 등과 함께 어울리며 문학적 무드에 취해 살았다.
1953년 서울대 학보 《대학신문》에 작품을 응모해 낙방했지만, 심사를 맡았던 주요섭 선생이 선후 소감에서 “낙선시키기에는 아까운 작품”으로 「희생」(문리대 박맹호)을 거론하면서 이후 문청 박맹호는 소설이라는 올가미에 갇히고 만다. 그해 가을 창간된 종합 시사지 《현대공론》에 「해바라기의 습성」이라는 작품을 투고해 당선되면서 소설에 대한 자신감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1955년 《한국일보》 제1회 신춘문예 응모는 박맹호가 소설가를 꿈꾸었던 과장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된 ‘사건’이었다.
단편 「자유 풍속」은 당시 자유당 독재 정권을 희화한 풍자 소설로, 이승만 독재 정권의 기반이 굳어진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을 다룬 신문을 읽다가 아이디어를 얻어 탄생했다. 독재의 서슬이 시퍼런 가상의 나라 ‘지남공화국(支南共和國)’을 배경으로 거리를 떠도는 낭인 ‘맥파로(麥波路)’가 그 주인공이다.
맥파로는 외국 군인이 버린 모자 하나를 삐뚜름하게 주워 쓰고 거리를 배회한다. 어느 빵집 유리문 앞에서 전쟁미망인 주인 여자가 베푸는 빵 한 조각의 호의에 겨우 허기를 면하는 신세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많다. 이승만 정권이 부산 정치 파동 때 국회를 장악하기 위한 명분으로 ‘관제 데모’를 획책했는데, 이 작품의 축을 이루는 서사가 바로 이 사건이다. 맥파로가 거리를 배회하다가 이 ‘정의로운 투쟁’에 합류하게 되고 어이없이 죽음을 맞으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맥파로 씨는 거의 숨을 거둘 무렵 뜨거운 눈물이 볼을 가르는 것을 느꼈다. 거룩한 수상의 은총이 뼛속에 사무친 것이었다. 하찮은 목숨이나마 자유와 수상을 위하여 쓰러질 영광을 주다니! ‘오, 겨레의 등불이여!’ 수상의 거룩한 모습이 삼삼히 피어올랐다. 풍부한 영양과 충분한 휴식이라는 무기한 연장된 중책을 어깨에 메고 굶는 자유를 더욱더 사랑하는 현명한 시민들을 너그러이 굽어 살피는 성스러운 자태였다.(39쪽)@

이 작품을 1955년 제1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는데, 불운하게 빛을 보지 못한 과정이 계기가 되어 역설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당시 신춘문예 심사 위원이던 문학 평론가 백철과 소설가 최정희가 「자유 풍속」을 당선작으로 선정했지만, 갓 창간한 신문사에서 자유당 정부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우기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백철은 1955년 1월 1일자 《한국일보》 신춘문예 「선후 소감」에서 “박맹호의 「자유 풍속」은 지금까지 우리 문단에서 그 예가 없는 장관을 창조한 작품으로, 나는 이 응모작을 일석(一席)으로 하고 오상원의 「유예」를 이석(二席)으로 정했는데 결국 (중략) 「유예」가 입선되었다.”라고 썼다. 이후 《한국일보》 문화부장이던 한운사 씨가 미안함을 표시하며 그해 5월 일요판에 다른 소설을 게재할 기회를 주었다. 그때 게재된 소설은 「오월의 아버지」라는 단편이었다.

@지금도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내 능력을 스스로 간파하고 과감하게 소설가의 길을 포기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긴요하고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안 되는 일이라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미련을 버리고 되는 길을 찾아 왔다. 이런 면에서는 나는 냉정한 리얼리스트에 가깝다. 소설가의 길은 청산했지만 소설로 지새웠던 문학청년 시절이 후일 민음사를 만들고 한국에 문학 단행본 시대를 본격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42, 43쪽)@

◆ 민음사를 창업 전후를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는가?

1966년 5월 19일, ‘민음사’라는 이름의 출판사 등록 허가증이 정식으로 교부됐다. 사무실은 광화문 옆 동아일보사 옆 ‘전일사’라는 전화 판매점을 이용했는데, 처남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말하자면 민음사는 의자도 없이 서서 전화만 받는 ‘스탠딩 컴퍼니(standing company)’였던 셈이다. 편집과 교정 작업은 필자에게 원고를 받아 집에서 했다. 아버지는 예상대로 “그 책들 한 트럭 정도 내다 팔면 휴지로 끝나는 거 아니냐?” 하시며 냉대했고, 아내의 패물을 팔아 마련한 사업 자금은 민음사를 차린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바닥이 났다.
첫 책으로 오키 마사히로(沖正弘)가 일본어로 번역한 『요가』(S. 에스디안, 요기 뷔르다스 지음)라는 책을 출간했다. 박맹호 회장 출판 인생의 멘토 역할을 한 신동문이 권유한 책이었다. 198쪽 분량의 양장본으로 만든 『요가』는 처남의 전화상 전일사에 나가 여기저기 전화 통화를 하면서 혼자 만들어 낸 책이다. 이것이 민음사의 첫 출발이었다. 책값은 250원을 매겼고, 초판 발행일은 1966년 6월 10일(5쇄 1966년 9월 6일)이었다. 『요가』는 1만 5000권이 팔려 나가면서 요즘으로 치자면 수십만 권에 해당하는 초대형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서점들이 독촉을 하는 바람에 양장이 마를 새가 없어 물량을 대느라고 애를 먹었다. 첫 책이 이리 성공을 거두고 나니 출판이 쉽고 간단해 보였다. 그러나 이후 출간한 책들이 실패하면서 순식간에 빚이 불어났다. 약국을 하던 아내가 10원짜리 활명수를 팔아 모은 돈으로 그 어려운 상황을 버티었지만,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삶에 대한 절박한 회의가 밀려왔다.
그때 권유받은 것이 일본 책 ‘리프린트’였는데, 이것은 외국 책을 번역도 하지 않고 통째로 들여다가 복제해서 파는 것이었다. 책만 잘 고르면 큰돈 들이지 않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일본판 『건축 설계 자료 집성』이라는 책을 찍어 냈고, 그 비싼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면서 빚도 청산하고 얼마간의 자금 여력도 확보했다. 그러나 해적 출판을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외판 조직과 결별하고 그 일에서 손을 털었지만, 당시 한국은 저작권 조약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아 일본과 같은 출판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도 깊어졌다. 한 권 한 권 정성 들여 책을 출판하고 서점 등 유통망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기 위해 애쓰는 단행본 출판 시대를 여는 데 앞장선 배경에는 그때의 고통이 작용했던 것이다.

◆ 1970년대 ‘세계 시인선’ ‘오늘의 시인 총서’ 등을 출판해 ‘시의 시대’를 열었을 때, 고은, 김현 등과 의기투합해 벌였던 일은 무엇인가?

1966년 박맹호 회장과 처음 만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정을 이어 온 고은 시인은 얼마 전 박맹호 회장과의 관계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처음에 박맹호를 만나자마자 거의 혈연화해서, 서로 타자로 느끼지 못하고, 일종의 서론이 없는 본론부터 시작한 셈이었다. 민음사는 그때 전후의 고아처럼 집이 없어 다방에서 만나 편집을 하고 친지 회사의 조그만 구석을 빌려 거기다가 의자를 하나 놓고 점심때는 짜장면, 밤에는 독한 소주를 마시고 지냈다. 산중에서 살다 제주도에 있다 나왔으니까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의 서울을 산 것인데, 그때 나는 박맹호와 늦은 청춘을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매일 출근해 곁에서 가르쳤”던 고은 시인을 통해 김현을 만났다.

@서울대 불문과 후배인 문학 평론가 김현(1942~1990)은 고은을 만나러 청진동 옥탑방 시절부터 민음사 편집실을 드나들었다. 고은을 비평적으로 높이 평가한 이가 김현이었고, 그들 둘 사이는 매우 친밀했다. 점차 김현과도 출판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일이 잦아졌다. 김현의 첫인상은 아주 좋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참 재간이 많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잘 웃고 상당히 포용력이 컸으며 붙임성도 좋았다.(75쪽)@

1970년대부터 박맹호 회장은 고은, 김현 등과 더불어 일련의 단행본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김현, 김치수, 김주연, 김병익 등이 편저자로 참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 비평서로 평가받은 『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 등 평론집들을 포함해 박성룡의 두 번째 시집 『춘하추동』(1970)과 이가림의 『빙하기』(1973), 정현종의 『사물의 꿈』(1972), 당시로서는 신예였던 『박상륭 소설집』(1971)과 이청준 창작집 『소문의 벽』(1972), 이제하의 소설집 『초식(草食)』(1973), 박태순 창작집 『정든 땅 언덕 위』(1973)도 연달아 펴냈다. 고은의 『이중섭?그 예술과 생애』, 『1950년대』도 1973년에 펴낸 책이다.
하지만 민음사가 제대로 문학 출판사로 확고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한국 문단에도 기여했다고 여겨지는 첫 기획은 바로 ‘세계 시인선’과 ‘오늘의 시인 총서’의 출범이다. 세계 시인선은 1973년 12월 첫선을 보였다. 이백과 두보의 작품을 실은 『당시선』(고은 역주),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김현 역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검은 고양이』(김주연 역주), 로버트 프로스트의 『불과 얼음』(정현종 역주) 등 네 권이 그 시작이었다. 원문이 함께 실리기 때문에 웬만큼 실력 있는 번역자가 아니면 도전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국내 시인을 포함, 세계 저명 시인 100명을 선정해 100권을 기획 출판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시작했다. 각 권은 시인의 작품 세계와 연보, 대표 시들과 그 원문을 실었고 편마다 역자의 주를 붙였다. 각 권 100여 쪽에 책값은 300원이었다. 이 시리즈는 이어 고트프리트 벤의 『올페의 죽음』(김주연 역주),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김현 역주), 예이츠의 『첫사랑』(정현종 역주), T. S. 엘리엇의 『황무지』(황동규 역주), 헤세의 『흰 구름』(정경석 역주), 보들레르의 『악의 꽃』(김붕구 역주), 에즈라 파운드의 『지하철 정거장에서』(정규웅 역주), 『서정주 시선』 등으로 이어졌다.
그전에도 외국 시인들의 시집이 나오긴 했지만 모두 일본판의 중역이거나 불성실한 번역으로 원시(原詩)의 맛을 볼 수 없었다. 이런 종전의 오류를 모두 바로잡아 책임 있는 번역을 시도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요, 또 책임 있는 출판사의 책임 있는 일이라 이제는 안심하고 세계 시인선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찬사가 이어졌고, 독자들의 반응도 매우 고무적이었다.
세계 시인선의 성공에 고무되어 오랫동안 벼르던 국내 시인시 선집 시리즈, 젊은 비평가들이 선정한 ‘오늘의 시인 총서’를 출범시켰다. 1974년 9월 25일 오늘의 시인 총서 1차분 다섯 권이 세상에 나왔다.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 김춘수 시선 『처용』, 정현종 시선 『고통의 축제』, 이성부 시선 『우리들의 양식』, 강은교 시선 『풀잎』 등이 그것이다. 당시 문단의 주류를 이루면서 출판을 좌지우지하던 해방 이전 등단 시인들을 가급적 배제하고, 현대성에서 나름의 성취를 이룬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리스트를 선정했다. 첫째 권으로 나온 김수영은 지금은 한국 시의 ‘거대한 뿌리’가 되어 있지만 당시로서는 변변한 시집도 펴내지 못하고 요절한(1968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불운한 시인이었다. 당시 시인들은 특별한 대중성이 없거나 자비 출판이 아니라면 첫 시집을 내는 데 10여 년 이상 걸리는 게 일반적이었고, 신작 시집을 출간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방 이후 한국 시단의 성과를 거두어서 하나의 시리즈로 엮어 보려 한 것은 과감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당연하게 예상했던 것처럼 이 시집들은 창고에서 썩지 않고 발간 두 달 만에 초판 각 2000부가 모두 매진됐고 재판에 돌입했다. 특히 『거대한 뿌리』는 3년 동안에 3만 부가 팔렸다. 유족들은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서 이를 종잣돈으로 삼아 『김수영 전집』(전 3권) 출간을 의뢰했고 박맹호 회장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한국의 젊은 시인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문학상인 ‘김수영 문학상’도 물론 이 책의 인세에서 나왔다.
나중에 시집 판형으로 불리게 된 국판 30절 판형을 사실상 최초로 시도한 것도 이 시리즈부터였다. 박맹호 회장은 일본 출판의 영향을 받은 기존의 국판 형태나 사륙 변형판으로 나오는 시집이 시를 읽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세로로 좀 더 날씬한 형태로 만들어 세련된 느낌이 나는 동시에 휴대성을 높여서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 좋도록 디자인했다. 그러면서도 판형 변형에 따른 종이 상실이 전혀 없어 가장 비용을 아낄 수 있는 30절 판형을 개발했다. 이 판형은 이 시리즈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한국 시집 출판의 표준 형태로 자리 잡았다. 그 외에도 한글의 구조에 맞추어 시집에서는 처음으로 가로쓰기를 시도했는데 독자들은 처음에 이를 낯설어했지만 곧 대단한 호응으로 보답해 주었다.

◆ ‘오늘의 작가상’으로 단행본 출판 시대를 주도했을 때, 작가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가?

민음사에 가끔 들러 자문을 해 주곤 하던 유종호 교수와, 고려대 영문과의 김우창 교수를 편집 위원으로 하여 1976년 계간 《세계의 문학》을 창간했다. 민음사만의 문학적 개성을 드러낼 매체가 없던 상황에서, 우리의 문학을 세계 문학의 차원에서 소개하고 연구, 평가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만든 이 계간지는 2012년 겨울로 통권 146호가 출간되었다. 이 《세계의 문학》의 창간과 함께 민음사를 한국 문학 출판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중요한 초석이 바로 ‘오늘의 작가상’ 신설이었다.
계간지 창간호에 오늘의 작가상 모집 공고를 실었다. 시, 소설, 평론 3개 장르에 걸쳐 모집했고 응모 자격은 신인은 물론 이미 문단에 오른 기성 대우의 신인까지로 대상을 넓혔다. 그때까지 문학 출판의 흐름이나 문단 지형에서 이 상이 응모자들에게 가장 매력이 있었던 조건은 당선과 동시에 바로 단행본으로 출간한다는 조항이었다. 당시에는 통속 작품을 제외하면 본격 순수 문학 작품을, 그것도 신인의 작품을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박맹호 회장은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과감히 시도하기로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기성의 공간이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서운 신예들이 우리 눈 밖에서 칼을 갈면서 작품을 쓰고 있다고 믿는다. 내가 출판을 하면서 가장 신경 썼던 것은 이 작가들을 주목함으로써 그들을 새로운 문학적 질서의 선구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1976년 9월 창간호에 공고를 내보낸 후 그해 겨울호 《세계의 문학》에 1회 수상작으로 한수산의 장편 소설 『부초(浮草)』 1030매를 전재했다. 장편 소설 한 권 분량을 나누어 싣지 않고 한꺼번에 다 수록한 것은 잡지 사상 처음이었다. 분재를 하면 독자들에게 잊히기 쉬워 폭발력이 그만큼 약화되리라는 생각에서 이처럼 파격적인 결단을 내린 것이다. 2호가 시중에 배본되자 문단은 술렁거렸고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리고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30만 부가 넘게 팔리는 대형 베스트셀러로 각광받았다. 1978년 제2회 수상작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 강』, 1979년 제3회 수상작 이문열이 『사람의 아들』이 출간되며 문단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오늘의 작가상은 김광규 시집 『반달곰에게』, 최승호 시집 『대설주의보』, 조성기 장편 소설 『라하트 하헤렙』, 강석경 장편 소설 『숲속의 방』, 이혜경 장편 소설 『길 위의 집』, 이만교 장편 소설 『결혼은 미친 짓이다』, 정미경 장편 소설 『장밋빛 인생』 등 숱한 화제작을 낳으면서 지금까지 계속되어 신인 발굴의 위업을 더하고 있다.

◆ 정병규와 함께 북 디자인 시대를 개척해 나갈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

박맹호 회장의 신념이 잘 드러나는 분야로 책 디자인과 광고를 꼽을 수 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내 출판사들은 디자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표지보다도 먼저 독자들과 만나는 광고를 감각적으로 만드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박맹호 회장은 내용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담는 그릇 또한 고급하고 세련되기를 갈망했다.
민음사는 단행본 출판 사상 거의 최초로 모든 책에 본격적으로 가로쓰기를 도입했고, 책 디자인 개념이 없던 시절에도 이미 표지 디자인에 많은 공을 들였다. 1973년부터 선보인 세계 시인선 표지들은 지금 내놓아도 전혀 감각이 뒤떨어지지 않는 걸작이다. 당시 표지는 《중앙일보》에서 《계간 미술》 주간을 거쳐 《중앙일보》 사장까지 역임한 뒤 최근 문화예술진흥원장에 임명된 권영빈과 소설가 김승옥, 작고한 이중한이 시안을 만들었다. 김승옥은 소설에서도 천재적인 감각을 발휘했지만 디자인 감각 또한 탁월했다. 세계 시인선은 한국 시집 출판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가로쓰기를 시도했다. 원문을 함께 실으려니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이는 이전부터 가독성이나 디자인 등을 고려할 때 책을 모두 가로쓰기로 만들고자 했던 박맹호 회장의 고집이었다. 이후 민음사는 모든 책을 가로쓰기로 만들었고, 비슷한 시기에 많은 단행본 출판사들이 함께하면서 출판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책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은 만큼 이를 제대로 수행할 만한 인재에 대한 갈망 또한 늘 컸다. 그럴 때 정병규를 만나 같이 일하게 된 건 한국 책 디자인 문화를 일구어 내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차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정병규는 당시 고려대에서 문학회 활동을 하고 《고대신문》에 들어가 편집국장까지 하면서 신문 여덟 개 면을 혼자 편집하다시피 했다. 그러던 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기사를 《고대신문》 1면에 실었다가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면서 학교를 휴학했는데, 그 기간에 신구문화사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신구문화사는 출판 사업을 기반으로 막 신구전문대학을 설립한 시점이어서 정병규는 출판사 홍보물은 물론 대학 홍보 작업까지 잡다하게 맡아야 했는데 그때 옆자리에서 근무하던 동료 직원으로부터 민음사행을 권유받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정병규를 만나자마자 단번에 그 안의 천재를 느끼고 편집장 자리를 제안했다. 그러자 주로 밤부터 새벽까지 일하는 스타일이어서 오전에 출근하기가 어려우니 오후 3시경에 나와도 괜찮겠느냐고 조건을 달았는데, 나는 아무 말 없이 수용했다. 나는 사람을 채용할 때 상당히 까다롭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서 재는 편이지만, 일단 채용하기로 결심하면 끝까지 믿는 스타일이다. 사람을 믿지 않으면 일이 되지도 않거니와, 또한 신뢰하고 일을 모두 맡기면 그만큼 그 사람도 변하게 마련이다.(111쪽)@

정병규의 첫 작품은 1977년 제1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부초』였다. 파란빛이 도는 어두운 추상화를 배경으로 제목을 크게 부각시킨 표지였다. 채색 회화 중심이던 당시 표지 디자인 관습으로 볼 때 대단한 파격이었다. 책 뒤에 지은이 사진을 크게 싣는 스타일도 출판계에서 이후 10여 년 동안 유행했다. 정병규는 이후 오늘의 작가 총서를 비롯해 다양한 단행본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았고, 민음사는 정병규와 함께 여러 광고 디자인 또한 시험해 볼 수 있었다. 박맹호 회장의 도움으로 일본과 프랑스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고 돌아온 정병규는 한국 최초의 전문 북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박맹호 회장은 한국 출판계에서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하는 “거대한 전환의 출발점에서 정병규와 함께 출판문화의 한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약동한다.”(117쪽)라고 술회한다.

◆ 1980년대 ‘수요회’ 활동을 둘러싸고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는데.....?

‘수요회’는 잡지들이 폐간되고 사방에서 표현의 자유가 옥죄어 오는 시점에 1970년대 이래 의미 있는 단행본들을 펴내는 출판인들이 결성한 모임이다. 발단은 사소한 친목 모임에서 비롯됐지만, 출판인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모종의 공동 전선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일치했던 것이다.
민음사 박맹호를 포함해 김병익(문학과지성사), 이우석(문학예술사), 이기웅(열화당), 김진홍(전예원), 김경희(지식산업사), 김윤수(창작과비평사), 김종찬(평민사), 김언호(한길사), 이재철(홍성사) 등이 그 멤버였다. 이들을 기본으로 박종만(까치), 조근태(현암사), 최동식(정음사)도 드나들었다. 이들 중 김종찬, 최동식, 조근태, 이우석이 중간에 빠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요회 해체 때까지 함께 시대를 건너갔다. ‘수요회’가 중견 출판인 그룹이라면 이보다 2년쯤 뒤에 결성된 ‘금요회’는 대부분 학생 운동권 출신의 젊은 출판인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수요회가 출판계의 의지를 한데 모으는 대외적인 창구 역할을 하고 큰 틀에서 출판 환경을 개선해 나가는 데 노력한 실세였다면, 금요회는 향후 진보 세력의 토대가 된 출판 운동가들의 터전이었다. 금요회에는 거름(박윤배), 돌베개(임승남), 한울(김종수), 형성사(이호웅), 일월서각(김승균), 청사(함영회), 이삭(소병훈), 지양사(박숙희), 사계절(김영종), 풀빛(나병식), 민중사(최민화), 동녘(이건복), 한마당(이우회), 백산서당(서원기), 온누리(김용항), 화다(백원담), 석탑(최영희), 실천문학사(이문구) 등 열여덟 군데 출판사가 참여했다. 수요회는 실질적으로 1980년대 한국 출판계를 대표한 조직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출판계의 공식 기구인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임원진이 버티고 있었지만, 대부분 교재나 전집 회사들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당국에서도 수요회의 움직임에 늘 촉각을 세웠고, 수요회를 실질적인 출판계 대화 창구로 상정했다. 수요회는 출판계의 뜻을 집약해 출판 정책에 대해 정부에 건의하기도 하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수요회가 수행했던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한국 출판계 최초로 정부에 항의하는 공식적인 목소리를 낸 ‘출판인 17인 선언’과 ‘오늘의 책’ 선정 그리고 ‘서점 공간 확대 운동’ 등 세 가지를 박맹호 회장은 중요하게 꼽는다.
‘출판인 17일 선언’은 1985년 5월 17일에 이루어졌다. 당시 신군부는 이념 서적 단속을 구실로 법원에서 영장까지 받아 출판사를 압수 수색하고 서점에서 책들을 거두어들이는 등 출판 행위를 한층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수요회를 중심으로 출판인 17인이 모여 「출판문화의 발전을 위한 우리의 견해」에 서명하고 1985년 5월 17일, 이를 각 신문사에 보냈다. 1980년 신군부 쿠데타 이후 한국 출판인들이 공식적으로 집단의 목소리를 낸 첫 사건으로, 이후 당국이 출판계를 예의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 민음사는 “좌파 출판인들과 합세해 출협을 접수하려고 했다는 혐의”(142쪽)로 특별 세무 조사를 받았다. 출판사 특별 세무 조사는 매우 드문 일로 민음사를 비롯 고려원, 실천문학사, 동녘, 청하출판사 등이 대상이 되었다. 당시 민음사 1년 매출액이 5억 원 정도인 상황에서 추징 세액 1억 원을 통보받았다. 그해 10월 중부 서울 지방 국세청 국정 감사장에서 민주당 김덕룡 의원이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출판사에 대한 문공부의 출판 탄압에 국세청이 앞장선 것 아니냐.”(143쪽)라고 질타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 한국 학술 출판을 업그레이드한 ‘대우 학술 총서’는 어떻게 출판하게 되었는가?

@민음사를 창업할 때부터 나는 민음사를 문학의 영역을 넘어서 종합 대학 하나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아카데미즘의 중심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때문에 1981년, 대우 재단에서 ‘대우 학술 총서’를 발간할 출판사를 공모했을 때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를 맡으려 했다. 실제로 프랑스의 갈리마르 출판사, 독일의 주어캄프 출판사, 일본의 이와나미서점 등이 보여 주듯이, 시대정신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원칙을 잃지 않고 꾸준히 양서를 펴내기만 한다면, 실제로 한 출판사의 영향력은 웬만한 대학만큼이나 크리라고 생각한다.(153쪽)@

김우중 대우 그룹 회장은 1978년 ‘대우 문화 복지 재단’을 설립한 지 두 해 뒤인 1980년에 200억 원 상당의 기금을 재단에 새로 출연했다. 한국 학문의 기초 분야 진흥을 위해 사용해 달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대우 재단은 국제 정치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이며 초대 통일원 장관을 지낸 이용희 서울대 교수를 이사장으로 영입해 기초 학문 전반의 균형 성장을 위한 학술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그것이 한국 학술 출판의 새로운 역사를 쓴 대우 학술 총서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제대로 된 학술 서적이 부족한 편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당시는 기초 과학 도서나 기초 인문학 도서가 교과서 외에는 거의 발간이 안 될 때였다. 이런 때에 자연 과학과 인문학 분야에서 세계의 양서들을 번역해 소개하고, 국내 유수 학자들의 우수한 연구 업적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대우 학술 총서는 매우 획기적인 기획이었다.
몇몇 출판사가 대우 학술 총서 출판사 공모에 지원을 했지만, 대우 재단에서 지원해 조는 것이라고는 발간 비용을 보전하는 명목으로 종당 수백 권을 사 주는 게 전부였기에 모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러나 박맹호 회장은 “출판사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좋은 필자를 발굴하는 일”(154쪽)이라며 당장은 고달파도 한국 학술계의 역량이 집결되는 총서 작업에 참여하는 일에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 이 일을 맡았다.
신일철 고려대 철학과 교수(인문 과학), 노재봉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사회 과학), 김용준 고려대 화학과, 장회익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자연 과학)가 대우 학술 총서의 각 분야별 자문 위원으로 참여했고, 그 첫 결실이 1983년 11월에 인문 사회 과학 분야로 출간된 김방한 서울대 교수(인문대 언어학과)의 『한국어의 계통』이었다. 『한국어의 계통』은 대우 학술 총서에서 성공한 저작물 중 하나로 일본어로도 번역되어 엄청나게 팔리는 성가를 누렸다. 이 책을 필두로 『문학사회학』(김현), 『상주사(商周史)』(윤내현), 『인간의 지능』(황정규), 『중국고대문학사』(김학주), 『일본의 만엽집(萬葉集)』(김사엽), 『현대의미론』(이익환), 『베트남사』(유인선), 『인도철학사』(길희성), 『한국의 풍수 사상』(최창조) 등이 이어졌다. 그동안 일반의 인기가 없어서 출판이 부진했던 분야의 연구서여서 학계에서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민음사는 아예 대우 학술 총서만을 전담하는 편집 팀을 따로 꾸렸는데, 이 팀은 이직률이 제일 높은 편집부의 ‘무덤’이기도 했다. 딱딱하고 전문적인 내용을 꼼꼼히 편집해야 하는 데다 특별히 독자들의 호응이 높은 것도 아니어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쉽게 싫증을 느끼곤 했다. 게다가 연구 성과를 집약하는 데 신경 쓰느라 문장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필자 관리도 까다로워 책으로 나오기까지 상당한 진통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재단 측은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학자들에게는 한 과제당 초창기에는 300만 원, 중반부터는 500만 원으로 늘려서 연구비를 지원했다. 연구 시한은 1년 반이지만 대부분 원고 완성까지 2~3년씩 걸렸고, 심한 경우는 10여 년이 지난 시점까지 원고가 들어오지 않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학술 문화 사업이라고 대우 재단 관계자들뿐 아니라 우리 학계의 많은 사람들이 뿌듯해하며 값진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정작 책을 만드는 출판사에 대한 지원은 초창기에는 고작 인문학이나 사회 과학 서적은 200권, 제작비가 더 들어 가는 자연 과학 쪽은 300~400권을 구입해 주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았지만, 시장이 좁은 책들인 만큼 출판하는 책마다 대부분 겨우 제작비를 메우거나 그러지 않으면 적자를 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음지에서 민음사가 만만치 않은 사회적 기여를 한 셈이다.

@사실 이런저런 애로에 대해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던 것이, 처음부터 대우 학술 총서는 상업적 이득을 포기하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출판계에 들어서면서 하고 싶었고 해야 할 일이 궁극적으로 이런 작업인데 그냥 좀 기여하자, 이런 다짐이었다. 만약 여기서 손을 털고 나간다면 고향에 아버지의 땅이 있으니, 내려가 농사라도 지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속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출판을 접고 아버지 곁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최후의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158쪽)@

대우 학술 총서는 민음사에서 1983년부터 1999년까지 16년 동안 모두 424권을 간행했다. 대우 그룹이 1998년 와해되면서 수백 권씩 사주던 지원마저 여의치 않아 재단에서 받지 못한 제작비가 수천만 원에 이르렀다. 재단은 돈이 없으니 대우자동차에서 생산한 리무진 ‘체어맨’을 책값 대신 가져가라고 했다. 박맹호 회장은 “다소 모욕감을 느낀 데다 이런 상황에서 대우 학술 총서를 계속 출간하는 건 더 이상 힘들다고 생각해서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국산 중형 승용차를 고집했는데, 이 과정에서 생전 처음으로 본의 아니게 커다란 자동차를 타는 호사를 누려야 했다.”(162쪽)라고 술회한다. 이후 대우 학술 총서는 재단에서 따로 ‘아카넷’이라는 출판사를 차려 꾸준히 출간을 이어 나가 2011년 1월에 600권을 돌파했다.

◆ 이영준 주간을 발탁해 전문 편집자 시대를 연 이유는?

1990년대 들어 출판 환경이 급변했다. 1993년 한국이 세계 무역 기구에 가입하면서 자동적으로 베른 조약 회원국이 되어 그전에는 계약 없이 무단으로 펴내던 해외 작품들도 저자 사후 50년까지 보호하게 되었다. 2000년부터는 저작권 없이는 사업이 불가능해졌고 민음사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 해외 저작권을 적극적으로 확보하고 나섰다. 박맹호 회장은 “오래전부터 나는 외국 출판인과 만날 때마다 ‘바이킹’이라는 콤플렉스를 느껴 왔는데 이 기회에 이를 말끔히 씻어 버리고 떳떳하게 세계로 나서고 싶었다.”(210쪽)라고 술회한다. 또한 독서 대중의 욕구가 폭발하면서 매주 수백 권의 책이 쏟아졌고, 독자들도 문학, 인문학 쪽에서 점차 세분화되어 그림책이나 만화에서 과학서나 실용서에 이르기까지 영역별로 흩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사가 오랜 생명력을 갖고 살아남으려면 사장의 관심에 따라 출판이 좌지우지되는 종래의 출판 구조보다는 사장은 관리와 경영만 전담하고 편집이나 마케팅 등은 이를 전문으로 하는 인재를 모아 능력을 펼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밀려왔다.”(203쪽) 입사 4년차 편집자인 이영준을 주간으로 전격 발탁하고 그를 중심으로 편집부를 다시 구성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민음사는 이때부터 편집자 중심의 주간 체제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또한 민음사가 문학?인문학 출판사로서 중심을 잡은 가운데 1994년 아동 청소년 서적 전문 출판사 ‘비룡소’, 1996년 장르 문학 및 대중 교양서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 1997년 과학책 전문 출판사 ‘사이언스북스’를 출범하면서 출판 영역을 세분화, 전문화해 나가는 질적 도약을 준비했다.

◆ ‘세계 문학 전집’은 왜, 언제부터 가슴에 품었는가?

1990년대 이후 민음사보다는 새로 생긴 비룡소나 황금가지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돋보인 건 사실이지만, 민음사도 멀리 내다보면서 차분하게 미래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독서계에 고전 열풍을 불러일으킨 ‘세계 문학 전집’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세계 문학 전집은 1976년 《세계의 문학》을 창간하면서 편집 위원들과 함께 기획했던 ‘이데아 총서’가 그 전신이다. 이데아 총서는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문학뿐만이 아니라 철학, 역사, 자연, 사회에 대한 지식을 골고루 갖추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총체적 균형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만든 것으로 1980년대 문학?인문학 총서로 출간되어 한국에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이 총서에 들어 있었던 인문 사상서들은 ‘현대 사상의 모험’ 시리즈로 정리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문학 작품들은 ‘세계 문학 전집’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 문학 전집은 1995년 기획되어 오랜 번역 기간과 편집 기간을 거쳐 1998년 8월에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시작으로 세상에 나왔다. 2012년 올해로 15년 만에 300권을 돌파하고, 총 1000만 부의 누적 판매 기록을 세웠다.

◆ 출협 회장 재직 시 죽음의 고비를 넘으셨는데, 그때의 심정은?

2005년 벽두의 출협 회장 선거는 여느 해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2008년까지 잇따라 열릴 대규모 국제 출판 행사들을 앞두었기 때문이다. 세계 출판계의 시선이 한국으로 집중되는 중요한 행사들이었다. 당장 그해 가을에는 세계 최대의 도서 박람회인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를 치러야 하는 데다, 2008년에는 4년마다 개최되는 국제출판협회 총회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서울?파주?청주를 대상으로 유네스코 ‘책의 도시’ 선정 작업도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정부와 출판인 단체조차 세계 출판인 올림픽 격인 국제출판협회 총회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 총회는 드디어 한국 출판이 국제 무대에서 다른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상징성이 있는 데다, 그동안 쌓였던 국내의 질 높은 책들을 전 세계 최정상급 출판인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우리 저자들을 세계 시장으로 데려갈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어쩌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선정보다 훨씬 중요한 행사인데도 정부 당국자들은 개최 사실조차 잘 모를 정도로 무관심했다. 당시 출협 임원진으로는 이렇듯 중차대한 국제 행사를 제대로 치를 수 없으리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래서 출협 회장 선거를 앞두고 급기야 ‘2005년 한국 출판인 선언’이라는 성명서가 발표되기도 했다. 2005년 2월 24일, 박맹호 회장은 임기 3년의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으로 당선됐다. 그는 “출판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문화 일꾼의 위상을 찾아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것”(236쪽)이라며 결의를 다졌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성공적으로 준비하고 치러 내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지만, 박맹호 회장은 정작 그해 10월 19일부터 24일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주빈국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간 이식 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간암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말해 주지 않았고 그도 자각하지 못해 건강이 악화되어 가는 내내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쉴 새 없이 일했던 것이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일은 박맹호 회장이 또다시 잠시 멈추고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수술 전과 후, 인생관이 어떻게 바뀌었느냐고 묻곤 한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다만 직원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평가하기를, 수술 후에 내가 좀 더 유연해진 것 같다고 한다. 사람들 대하는 태도는 유연해졌을지 모르나 삶에 임하는 자세는 더 적극적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트위터를 배우기도 하고 인터넷 서점이나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수시로 책 판매 상황이나 인터넷 뉴스를 살피기도 한다. 아이폰이 유행하자 아이들이 말리는데도 홀로 사 들고 와서 이제는 모바일에 재미를 붙이는 중이다. 스케줄 관리도 수첩 대신에 아이폰의 스케줄 앱을 이용하고 있다. 이런 나를 보고 진취적으로 변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친구도 있는데 좀 더 살자면 매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 나이에는 스스로 포기해 버리면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70에 죽으나 90에 죽으나 죽을 때까지는 의식이 또렷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242쪽)@

◆ 최근 인문학 지원에 힘쓰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근래 박맹호 회장의 책상 위에는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첫 세 권이 올려져 있다.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구범진), 『제인 오스틴의 여성적 글쓰기』(조선정), 『카프카, 유대인, 몸』(최윤영)이 그것이다. 박맹호 회장이 서울대에 인문학 기금을 출연한 지 4년 만의 결실이다. 「간행사」에 이 책들이 갖는 의미가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하고 그 미래를 고민하며 시대를 헤쳐 나갈 인문학의 지혜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정작 ‘대중 인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저술들은 턱없이 부족하다. 서울대 인문 강의 총서는 창의적 학술성을 지닌 인문학적 지식이 가독성과 깊이를 겸비한 저술을 통해 학계 및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252쪽)@

박맹호 회장은 출협 회장을 그만두던 2008년부터 보다 생산적으로 인문학을 위해 기여할 방법을 고민했다. 단지 저술이나 연구 지원이 아니라 상아탑의 학자들과 대중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장을 열고 그것을 책으로 엮어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2001년 이미 인문대에 3억 원을 출연한 바 있는 박맹호 회장은 다시 2억 원을 인문대에 기부하되, 그 돈으로 학자들이 대중을 상대로 서울대에서 무료 강연을 하고 그 결과물을 총서 형태로 책을 내자는 데 합의했다.
2010년부터 서울대에서 진행되는 인문 강좌는 대중들을 상대로 해서 주로 젊은 40대 교수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문사철(文史哲)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인문학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 2012년 9월 말까지 모두 20회의 강연을 진행했다. 매회 고등학생, 대학생뿐 아니라 직장인과 주부, 자영업자에 이르는 다양한 사람들이 300~400명 정도 참여하는 등 좋은 반응을 얻었다. 처음에는 16회 정도 진행하고 끝내려 했지만 이러한 열의에 힘입어 32회까지 늘리기로 했다.

@인문학의 위기는 우리 사회의 위기일 수밖에 없다. 인문학을 경시하는 풍조는 훗날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경제 개발이 화두였던 1960년대 역시 인문학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인문학 전공자들의 긍지와 자부심은 굳건했다. 인문학의 위상 자체가 흔들리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쌈짓돈을 내어 인문학을 공부하는 신진기예들에게 숨통을 틔워 주는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기부했다. 서울대 인문대 측은 이를 바탕으로 ‘민음 인문학 기금’을 설립해 인문대 교수의 저술 및 연구비 지원을 도왔다. 인문학으로 이만큼 살아 온 만큼 이제는 그 덕을 인문학 발전에 돌려 기회가 닿는 대로 계속 힘을 보태고 싶다.(254쪽)@


책: 박맹호 자서전

저자
박맹호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12-07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현재형 청춘, 박맹호 회장이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책: 박맹...
가격비교

 

 

7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