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어떻게 읽을것인가『교양인의 독서생활』. 이 책은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저자 자신이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고민하고 직접 경험한 것을 회고하면서 해법을 찾고자 노력한 체험적 독서론을 담은 책이다.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이 들려주는 체험적 독서론”
일본에서 40여년 넘게 꾸준히 팔리고 있는 이 책의 장점은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이 책을 여전히 읽는 것일까? 시미즈 이쿠타로는 일본 지성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의 인생역정, 예를 들어 관동대지진을 비롯해 징용이나 패전 등등, 당시 일본의 풍경을 엿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또한 어떤 책을 고를 것인가, 왜 교양서가 필요한가, 메모의 방식은 어떤 것이 있으며, 쌓여가는 장서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그리고 글쓰기를 통한 독서의 완성과정에 관한 논의 역시 매우 흥미롭다. 책에 얽힌 일화들을 솔직하게 술회하는 장면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특히 출판환경이나 외국어 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 맞물려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디어 환경의 급속한 진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극한의 대립양상을 보이는 아이러니, 어쩌면 그것은 시미즈가 우려했던 교양의 부재, 책읽기의 부재, 글쓰기의 부재에 기인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 소수만을 위한 지적 쾌락, 교양서 |
“실용서나 오락서가 만인을 위한 책이라고 한다면 교양서는 선택받은 소수를 위한 책이다. 자신의 생활을 고양시키고 풍요롭게 하려는 결심을 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책이다.”(p.63)
차별은 나쁜 것일까?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싶은 욕구는 그릇된 생각일까? 차별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 테다. 단지 그것이 계급 현상으로 수렴되고 또 구조적인 모습으로 고착화되는 경우가 문제이지,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이기를 원하는 차별이란 내면의 욕망을 자극하는 쾌락의 경험이다. 오락서나 실용서만 읽는 사람과 교양서를 읽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락서, 실용서, 교양서의 구분은 무척 애매모호하다. 책을 읽는 목적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인류 최대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성경의 경우, 어쩌면 정말 오락거리로 즐기며 읽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에게 성경은 오락서다. 한편 ?아가씨와 건달들?에 나오는 ‘스카이’나 혹은 그 안의 ‘말씀’으로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어디까지나 성경은 실용서다. 단순한 유혹의 충족이 아닌 외적 강제, 즉 생활의 필요에 의해 읽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교양서의 역할도 한다. 니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혹은 서양철학 전반을 관통하는 사상의 근간을 파악하려면 성경을 읽지 않을 수 없다.
교양서란 그런 것이다. 교양서는 타율적인 강제가 아닌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스스로 찾아 읽는 책’이다. 적막한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지독하게 고독한 작업이다. 일체의 강요도 없고, 또 읽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 볼 일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양서를 읽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고 멋지게 만들어가고자 부단한 노력을 거듭하는 소수를 위한 책, 지적 쾌락을 추구하는 교양서의 존재이유는 여기에 있다.
| 결혼이 아닌 연애의 감성으로 교양서를 만나다 |
“책은 무리를 해서라도 산다. 내가 지금까지 가난하게 사는 것은 아마도 이 주관주의적 독서법의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책과 마누라만큼은 빌릴 수 없는 것이라며 체념하고 있다.”(p.104)
* 일단 책을 사자
냉혹한 출판시장에서 20여년 가까이 책을 만들고 있는 한 편집자는 이렇게 말한다. “독자들은 말도 못하게 까다롭고, 그들이 책을 살 때는 절망스럽거나 풀리지 않는 고민거리에 봉착한 상황에서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이리저리 재보고 나서야 비로소 주머니를 연다”고 말이다. 한마디로 책을 안 산다는 소리다. 경복궁이 야간개장을 하면 부랴부랴 돗자리 챙겨서 술판 벌일 시간은 있어도 서점에 들러 한 권의 책을 고를 여유는 없다. 이를 탓할 마음은 없지만 두어 시간 음주의 쾌락은 몇날 며칠의 숙취를 부를 뿐이다. 반면 한 권의 교양서는 두어 시간의 고독한 책읽기를 통해 수십 년간의 쾌락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환상적인 체험을 맛보려면 책을 살 수밖에 없다. 일단 책을 사야 한다. 책은 결혼 상대가 아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책을 사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 사람은 내면의 성장이 정체된 상태이다. 즉물적인 반응만이 되풀이되는 소모적인 일상, 우리는 이런 삶의 지루한 정체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그 속에 길이 있을지 없을지는 개개인의 몫이다. 없다고 느끼면 새로운 책을 찾아 떠나면 된다.
반드시 완독하겠다는 의무감 따위 역시 경계할 사항이다. 마치 연애의 감성처럼 서점에 들러 또는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눈에 띄거나 맘에 드는 것이 있으면 주저 없이 사야 한다. ‘지나가는 여인’을 아쉬워하는 보들레르의 후회를 반복해선 안 된다. 혹시라도 첫눈에 반한 책이 정작 사놓고 보니 읽기 싫다면 그냥 방치해 두었다가 나중에 인연이 닿을 때 꺼내 읽으면 그뿐이다. 외도는 불경스러운 일이지만 폭넓은 연애는 죄가 아니다.
* 체화된 책읽기와 소통의 기술
그렇다면 어떤 것이 좋은 책이고 어떤 책을 골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우선 책은 재미있어야 한다. 지적 허영심을 부추기는 책을 골랐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연애가 지겹다면 그것은 소통이 소원해지고 서로가 지루함을 느낄 때다. 독서행위는 철저하게 고립된 혼자만의 작업이지만, 한편으로는 책을 쓴 작가와의 끊임없는 소통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관념의a 급류’를 타고 쏜살같이 흘러갈 때는 함께 내달리고,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쉬어갈 때는 완급을 조절하며 관조적인 태도를 취한다. 책을 읽는 재미는 책이 갖는 무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의 소통에 달려 있다. 체화된 책읽기의 재미는 감동을 주고, 감동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교훈적인 촉매제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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