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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불이 켜진 약국 같은 미술관'을 소개합니다!
흐리거나 비가 내린 오후엔 어김없이 인사동을 갔던 때가 있습니다. 바로 한국화를 구경하기 위해서-제가 감히 관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입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 공부할 방이 마땅치 않아 식당을 찾아주시던 서예원의 원장님 배려로 묵향 가득한 서예원에서 숙제와 시험공부를 했었는데, 그 인연으로 한국화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고개를 쳐 들면 창문틀을 제외하고 사방이 붓글씨와 한국화로 그득한 묵향으로 얼룩진 벽을 둘러보는 재미에 빠져 넋을 놓은 적도 있었죠. 제가 공부를 할 땐 그림이 절 봐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장남에다가 살림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때라 '예술이 밥먹여주냐?'는 추호秋虎같은 아버지의 일갈에 붓을 놓았지만, 중학교 시절엔 사생대회에 나가 앨범과 상장도 받았던 터라 일말의 미련이 아직 남아 있나 봅니다. 제가 굳이 흐린 날을 택해 나가는 이유는 인사동 거리의 상점에 걸린 한국화를 보려면 유리에 비치는 반사광이 없어야 하거든요. 멀뚱히 서서 유리창 너머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머리 속에 묵향이 피어 납니다. 그리고 그림을 쫓다 보면 화가가 어디 쯤에서 붓을 들고 다시 먹을 찍었는지도, 무슨 색을 덧입혔는지도 알게 됩니다.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자면 어린시절의 내모습이 보인답니다. 어쩌면 흐린 날에 인사동을 찾는 이유는 '조금씩 잃어가는 나'를 주으러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해 부터는 미술관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온라인 카페의 주선으로 우연히 참석하게 된 후 자주는 아니지만 기회가 되면 찾아가 '구경'을 합니다. 정말 즐거운 경험이에요. 주말이나 방학땐 아이들이 많아 정신이 없더군요. -그랬던 적이 없는 저에겐 어린 나이에 명화들을 구경하는 아이들이 마냥 부럽기도 한 순간이죠- 그래서 평일 점심시간을 전후로 찾아가 마음껏 구경을 하곤 합니다. 작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멍청히 서서 그림을 쳐다보고 있자면 '막연한 감'마저 듭니다. 누가, 언제,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휴대용 마이크를 들고 무리를 이끌며 설명하는 분을 쫓아서 구경하긴 싫더군요. 그 분이 설명하는 만큼만 보여서 입니다. 내가 시간을 들이고 발품을 팔아 찾아온 이유는 그냥 구경하러 온 것이지 설명들고 외우러 온 것은 아니거든요. 말 그대로 바보스럽게 '구경'하고 싶어서 거든요. 내 맘대로 구경하고 내 맘대로 느끼다 가면 그게 '좋은 구경' 아닐까요? 예,예. 저 진짜 어쩔 수 없는 예술맹盲 입니다.^^;
지난 해 정말 멋들어진 책 한 권을 만났더랬습니다. 포털 사이트 Daum에서 10년 넘게 운영되고 있는 블로그, '김홍기의 문화의 제국' 쥔장 김홍기씨가 쓴 책 인데요, [샤넬, 미술관에 가다]라는 책입니다. 세계적인 명화에 대한 시선을 갸우뚱하게 쳐다 보며 '최고의 화가가 당시 첨단 패션으로 무장된 최고의 모델을 그린 화보'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명화속에서 당대의 복식과 패션을 찾아낸 그림과 글이 가득한 책이었죠. Daum의 파워블로거인 저자의 실력답게 엄청난 구독자와 언론에게서 작년에 많은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번엔 '영혼의 여백을 따듯이 채워주는 그림치유 에세이'라는 부제로 [하하 미술관]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명화를 설명할 정도의 심미안과 깊은 감성을 가진 김홍기씨를 다시 만날 기회인데, 예술의 문외한인 제가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흥미롭습니다. 이번에는 '국내작가들의 작품'으로만 구성했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정서를 한국미술가들의 작품으로 감성의 공감대를 만들어보려고 했다는데, 멋들어진 기획과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책 읽어주는 남자'를 진행하고 있는 저자가 이번엔 '그림 읽어주는 남자'로 변신한 겁니다.
Daum 블로그에서 파워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는 김홍기님의 블로그
아는 것도 많고, 실력도 월등하고, 게다가 인물도 훌륭한 동년배 비슷한 이런 치(?)들을 보면 그림을 구경하는 수준의 저는 은근히 부화가 납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적이지만 훌륭하다'고 한마디하고 한 수 배울 수 밖에요. 사흘 전 읽기 시작해서 오늘 밤을 하얗게 새우면서 이 책을 덮었습니다. 이 책 역시 '멋진 책'입니다. 저로서는 '적'으로조차 여길 수 없는 놀라운 '깜량'의 대단한 인물이 만든 책이었습니다.
전체적인 구성은 웃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내 인생의 화양연화, 거울 앞에 선 당신에게, 세상의 모든 시름들아 등 우리의 희로애락을 말하는 듯한 주제로 모두 27 편의 작은 제목에 27 명의 한국 미술작품을 소개했습니다. 한 쪽 한 쪽 마다 멋지고 놀라운 그림과 글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꿈보다 해몽' 이라 했나요? 저로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작가들의 작품들이 제 눈을 사로 잡았지만, 어느 분의 말처럼 저자인 김홍기씨는 '아름다움을 마음 가득 느끼며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바를 명확하게 글로, 말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린 작가들을 직접 찾아가 작가노트를 베끼고, 작품 설명을 들은 저자답게 한 작품을 오롯이 다시 글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글을 읽다가 보면 그림을 읽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으니까요. 저자는 '그림 읽어주는 남자'이기를 자청했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과 주변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피곤하고 고독한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구경'하면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실 미술관에서 한 작품 앞에서 몇 분 동안 서 있는 '관람객'을 보고 '빨리 빨리 비켜주지 않고 예의없이 멀뚱거리고...쯧쯔..' 하며 불평을 했더랬는데, 이제야 그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 작품을 들여다 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작품 속에서 자신을 치유하고 있었습니다. 작품을 보고 울고, 웃고, 미소짓고, 끄덕이며 '나'를 달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 책에서 '나와 내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6년 전 우울증에 빠졌던 제가 블로그를 처음 시작하면서 지었던 이름이 Richboy였는데, 온라인 속에서라도 한없이 넉넉한 마음을 갖고 있는 소년이 되고 싶어서 였습니다. 그래서 소년을 그린 그림들도 거의 웃는 모습이었죠. 우울해서 그린 그림은 웃는 모습이었고, 그림을 모두 그리고 미소지었습니다. 이 책의 표지에서 등장하는 [이순구님의 웃는 소년]은 마찬가지로 저로 하여금 미소를 번지게 합니다. 마음도 1도 따뜻해 졌습니다. 그리고 [전영근님의 여행]은 "낚시의 즐거움이란 월척을 낚는 기쁨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여행장비를 모두 갖추고 세상을 잊고 떠날 채비를 모든 끝내고 설래는 마음으로 대문을 나설 때"라는 존경하는 형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김순철님의 About Wish 0890]은 한도 끝도 없이 손만 넣으면 튀어나오는 '화수분'같아서 '희망'을 느끼게 했고요, [조장은님의 기억이 안 납니다]를 비롯한 그분의 그림들은 지금은 50을 넘긴 '골치덩이'였던 우리 고모의 처녀시절을 기억나게 했습니다. [주정아]님의 작품들은 어떻구요? 저 역시 '싱글천국 커플지옥' 을 외치며 길거리를 매운 가득 매운 '쌍쌍커플'들을 마구마구 저주(?)했던 얄궃은 때를 기억나게 합니다.
이 책 속에서 그림을 읽고, 글을 보고 있으면-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인女人이 아니라 餘(남을 여)人이 되어버린 울 엄니도 나오고, 밖에서는 상사와 고객의 눈치만 보는 능력 모자란 고문관일 지 모르지만 집에 오시면 호랭이같은 울 아버지도 나옵니다. 김연아 선수가 요정처럼 스케이트 타는 모습도 나오고요, '얼짱' 트렌드의 완결편 '플라스틱 걸Plastis Surgered Girl'도 등장합니다. 바비 인형, 고양이, 여자 아이 등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말 그대로 '없는 것 빼고' 모두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미술관을 관람하기는 참 멋진 문화생활입니다. 하지만 '시간과 비용'이 만만ㅎ지 않아 좀처럼 하기 힘든 문화생활이기도 하죠. 그래서 장사꾼인 제가 '경제학적 측면'에서 '장사치다운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바람이 있다면 '밤을 새워 문을 여는 화랑이나 미술관'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미술작품'이 보다 많은 관객에게 보여야 할텐데, 이들에게 정작 시간이 허락되는 '7 시 이후'에 볼 수 없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요? 개그맨 전유성씨는 '심야 볼링장'을 열어 볼링이라는 스포츠를 대중문화의 하나로 새로운 장을 열었고, 정동에 있는 스타식스 영화관은 밤 12시 부터 새벽까지 단돈 일 만원에 영화를 무려 세 편을 보여주어 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심야 영화의 명소로 각광을 받은 바 있습니다. '미술관과 화랑'은 안될까요? 제가 '천박한 상업적 발상'으로 감히 예술을 들먹인 것인가요?
늦은 밤까지, 아니면 편의점처럼 24시간 동안 운영되는 미술관이나 화랑이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미술 구경하기에 맛들린 저같은 사람들이나 미술을 사랑하는 많은 애호가들이 좋아할 겁니다. 미술가들도 좋아할 것 같습니다. 무슨 좋은 방법 없을까요?
아직은 없으니 아쉬운 대로 제가 대안을 제시할께요. 미술관을 옮겨 놓은 책을 구하세요. 그래서 허락되는 시간에, 지하철, 공원, 심지어 화장실까지 어디든 내키는 장소에서 그 책을 펴세요. 펴는 순간 여러분은 미술관에 온 겁니다. 마음껏 만끽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책을 볼 지 모르겠다면 제일 먼저 이 책을 권하고 싶네요. 마음에 담겨진 응어리도 풀어줄 책이니까요. 24시간 불이 켜진 약방같은 미술관, 바로 이 책을 보고 읽으면서 생각난 말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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