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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모음 - Readingworks/소설·비소설·인문·

결국은 사랑을 안 멋진 사내 오스카 와오, 몸으로 답했다

by Richboy 2009. 2. 28.

 

 

 

 

 

결국은 사랑을 안 멋진 사내 오스카 와오, 몸으로 답했다

 

  미지未知. 알지 못함은 암흑이다. '모른다'는 말은 '안다'는 말과 늘 동행하면서 '앎'을 추앙한다. 앎의 대상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관심이 없다는 '상관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관심은 있으면서 모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알고 싶어 답답해지고, 괴로워진다. 나아가 불행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럴 땐 '뭘 모르는 지 조차도 모르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는 것도 정도가 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알 수도 있고, 지나가는 행인의 속삭임처럼 한 번 들어봤음도 있다. 이런 어설프니들의 '앎'은 차라리 모르는 것 만도 못하다. 그래서 뭔가 확실하게 아는 자는 멋지다.

 

  누군가 사랑을 아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직도 대답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대상을 생각함에 잠시 숨이 멎고, 먹먹해지는 가슴통痛이 그것 아닌가 물을까, 비올 듯 흐린 하늘에서도 꽃만 꽂으면 딱 광녀일 것 같은 흐드러진 미소를 품게 하는 것이라 말할까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했던 그리고 경험하고 있는 것이 사랑일까, 내가 아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 '사랑은 이거다'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아직 모르겠다.

 

  여기 뜨거운 사랑을 하고 알아 낸 젊은이가 있다. 받아주는 이 한 명 없지만 순간 순간 자신의 사랑을 던진 청년. 거부하고 싶은 사랑고백은 추태이고, 원하지 않는 구애는 스토킹이라 했던가? 모두가 그 청년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결국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 사랑과 열정의 나라, 밥은 굶어도 사랑은 해야 하는 나라 도미니카 청년 오스카 와오의 사랑을 들어 봤다.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원제는 The Brief Wondrous Life of Oscar Wao  이다.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2008년 퓰리쳐 상을 수상했다.

 

 

 

 

  소설가의 가능성에 대해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밀란 쿤데라"소설가에게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헨리 필딩처럼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귀스타브 플로베르처럼 이야기를 묘사하거나, 로베르트 무질처럼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고 말한 바 있다. 밀란 쿤데라의 말대로 라면 주노 디아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묘사하고, 생각하는 힘을 지닌 독특한 소설가다. 뒤집어지는 웃음 속에 페이소스가 뭍어나게 하고, 신파극의 변사처럼 일인다역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독자를 청중인 듯 말을 걸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인가? 스무 페이지짜리 주석과 네 페이지 짜리 감사의 글(정말 순수하게 이름만 부르며 고마워하고 있다)이 달린 소설이라니, 거듭된 파격에 어리둥절하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제목에도 언급된 주인공 오스카 와오다. 오스카 데 레온은 시셋말로 전형적인 비호감이다. 140킬로그램의 몸무게와 여드름투성이, SF 장르소설과 롤플레잉 게임, 만화책, 판타지 소설에 빠져사는 오타쿠 청년은 모든 여성들의 혐오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는 단지 사랑을 하고 싶은 남자다.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무작정 달려 들어 '판타지 소설'의 대사같은 대화로 사랑을 고백하며 접근해 변태 찌질이 취급을 받아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 키스 한 번 해보지 못했지만 오스카는 단지 사랑을 하고 싶은 남자이다.

 

  소설은 화자 유니오르가 마음 내키는 대로 시간을 거슬르며 인물을 불러내고, 빠른 장면 전환과 낯선 사건과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독자의 눈을 휘둥그레 만든다. '오스카 가족 3대에 걸친 푸쿠와 사랑의 이중주적 서사시'라 할 만큼 소개되는 주인공들은 모두 독특한 사랑을 하고 불쌍한 비극을 맞이한다. 그들에게 펼쳐진 불행의 원흉은 푸쿠, 즉 실제로 도미니카를 31년간 독재로 휘두른 라파엘 트루히요의 저주 때문이라고 유니오르는 말했다. 처음 듣는 지명, 어려운 이름, 그리고 독특한 오스카의 성향 덕에 엄청난 SF 소설 대사와 의미들을 추적하고 인내하며 읽은 이유는 오스카 가족의 불행한 연애사가 한국의 여염집 과거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냉전체제의 1960년대 제 3 세계 국가들 중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이끌고 있는 국가들의 특징은 '군부' 그리고 '독재'였다. 통치자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밀고자'로 만들었고, 반대세력에게는 '응분의 조치'를 취했다. 소설 속에 언급된 트루히요의 푸쿠처럼 이 땅의 자식들도 '인권'을 주장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지금도 실종인 채로 남아있다. 독재자를 위한 성상납도, 누명에 의한 숙청도 이 땅에 엄연히 존재했던 불행한 과거였다. 트루히요의 독재 뒤에는 미국 정부의 비호가 있었는데, 미국과 트루히요가 내린 저주에 희생된 가족이야기가 미국인들에 의해 '상을 받다'니 얄궃은 아이러니다. 그가 미국으로 이민하지 않고 이 작품을 도미니카에서 냈다면 과연 퓰리처 상이 돌아갔을까? 트루히요의 저주로 출간마저 불투명하진 않았을까? 궁금해졌다.

 

  억장 무너지듯 가슴 아픈 오스카의 가족사는 이야기꾼 유니오르(사실은 저자 주노 디아스가 되겠지만)에 의해 영화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처럼 웃지 않을 수 없는 에피소드로 희화된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푸쿠로 인한 가족의 불행 속에서도 '사랑'이라는 명제 때문에 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을 녹여내고 있다. 주인공 오스카 와오이 과연 사랑을 할 것인가? 에 대한 의문은 점점 더해져 독자로 하여금 화가 날 만큼 고조시키지만, 어처구니 없는 반전은 '역시!'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한참 낄낄거리며 웃다 보면 불행과 행복의 구분, 사랑과 단순한 욕정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보이지 않는 독재의 저주와 이루고 말겠다는 사랑에 대한 열정에 모를 듯 알 것 같은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독자인 나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에 빠져 들어 단 둘이 앉아 귀를 세우고 듣고 있는 듯 하고, 그가 질문하면 답을 하고, 그가 외치면 박수를 치게 만들었다. 또한 남녀 상열지사에 중요한 모티브를 두고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은 누가 했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물론 승리자는 오스카 와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사랑의 다른 이름은 '인생'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생의 기쁨에 대해 오스카는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게 바로 이런 거로군! 젠장! 이렇게 늦게야 알게 되다니, 이토록 아름다운 걸!" 라고 고백했다.

 

"인생이란 그런거다 아무리 열심히 행복을 모아봤자 아무것도 아닌 듯 쓸려가버린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난 세상에 저주 따윈 없다고 대답하겠다. 삶이 있을 뿐. 그걸로 충분하다고."

 

  결국 일생을 두고 사랑을 추적했던 추하고 못한 오스카는 잘나고 멋진 가족들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찾았다. 절대로 사랑하지 못할 것 같은 오스카는 "결국이라고? 결국이란 없어. 세상에 진정한 결말이란 없거든." 언젠가 자신과 같은 사랑을 찾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지독한 루히요의 푸쿠도 진정한 사랑은 어쩔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희망은 사파(푸쿠의 역주문) 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유쾌하다 할까, 슬프다 할까 감히 딱히 단정 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소설이 품어내는 놀라운 흡인력과 매력은 지금까지 내가 답을 내지 못하는 '알 듯 모르는' 사랑을 경험한 오스카 와오가 있기 때문이란 것은 확실하다. 오스카 와오는 몸으로 사랑을 말했다. 사랑을 경험하고 알아낸 오스카는 멋진 사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