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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범인이 밝혀진 추리소설. 이것이 독자들이 열광하는 이유?
추리소설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범인이 누군지 알게 된다. “에게, 그럼 재미없어서 어떻게 읽어?”라 생각이 들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범인을 알면 추리소설은 끝장난다는 내 편견, “스릴러는 영화로도 충분하다.”는 생각마저 무너뜨린 소설이 있다. 스릴러 영화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맛이 있더란 말이다. 하긴 출간하는 작품마다 일본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될 정도이니 두 말 하면 입아프다.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의 소설, 악의惡意를 읽었다.
어느 날 유명한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처음 사체를 발견한 사람은 결혼한 지 막 한 달이 된 아내와 피해자의 가장 친한 친구. 목격자이자 용의자가 된 두 사람은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다. 사건을 담당한 형사는 사건을 추적하다 목격자중 한사람, 동화작가인 친구를 유력한 용의지로 지목, 추궁 끝에 자백을 받는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라면 정통추리소설의 흐름을 따르고 있다. 짐작할 수 있는 뻔한 내용, 뻔한 결말이다. 하지만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노의 진가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왜 죽였을까? 어떻게 죽였을까? 형사와 범죄자의 불꽃튀는 머리싸움을 지켜보기는 다른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만의 매력이다.
최근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곧 영화로도 개봉되는 ‘용의자 X의 헌신’이다. 물리학과 교수와 천재 수학자의 치열한 머리싸움을 지켜보다 그 매력에 빠져 저자의 전작을 만난 소설이 악의였다. 그래서인지 두 작품은 묘하게 닮은 데가 있다. 범인이 빨리 드러난 점, 불륜코드가 섞여 있는 점, 범상치 않은 지능을 가진 두 사람의 공방전, 사건의 내용을 완전히 엎어버리는 반전 등 아직 제대로 파악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풍의 사건전개방식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메이드 인 재팬‘의 냄새가 확연하다는 것. 노총각의 때늦은 사랑, 학교에 만연한 왕따문제, 노숙자문제등 현재 일본에 만연하고 있는 사회문제들은 일본에서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사회문제양상들이 소설속에 제대로 녹아 들어 있다. 소설 속 이야기들이 읽었을 때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라면, 앞으로 우리 사회에도 이런 사건들이 심상치 않게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특히 작가라는 직업 세계에 주목했다. 범인의 자백과 사건경위서 그리고 형사의 일지까지 스토리의 진행방식 역시 서로 번갈아가며 글로써 나타낸 점도 독특하다. 이 점이 사건을 전모를 흐리게 한 시발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결정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우리의 현실에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범인이 자백을 했다면 ‘옳다쿠나’하고 종결지어야 할진대, 소설 속의 형사는 그 점을 물고 늘어진다. 가가형사의 이 집요함은 “현상에는 항상 논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일본 드라마 갈릴레오 박사를 생각나게 했다. ‘충동에 의한 우발적 살인’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주도된 살인’임을 입증하게 된다. 같은 살인자이지만 한 순간의 실수를 할 수 있는 인간의 우발성을 내세워 일말의 동정을 얻을 수 있었던 가해자는 형사의 논리적이고 집요한 수사 끝에 ‘희대의 살인자’의 전모를 밝혀낸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현실속에서 ‘살인사건’이라는 현상은 종결은 언젠가는 이뤄지겠지만, 사건의 진실은 과연 얼만큼 밝혀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살인을 당한 피해자는 가해자의 자백에 의해 선과 악의 줄타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죄질에 의한 형량을 떠나 ‘진실’을 밝히는 것이 형사의 도리라면, 살인의 원인을 끝까지 추적함으로서 억울한 망자亡者의 한을 풀어주는 가가형사같은 진짜배기 형사는 과연 얼마나 있을까? 현실에서도 과연 그렇게 집요하게 수사할 수 있는 환경일까? 생각하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살인자의 심리 즉, 인간의 잔혹한 면에 주목한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인간이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 지에 집중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 통쾌하기 보다는 씁쓸한 여운이 항상 느껴진다. 한편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고스트라이터와 비슷하게 히가시노 게이고는 절대로 혼자서 쓰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생각해 보면 이럴 것 같다. 자신의 러프한 초고를 누군가에게 보여주면 누군가 초고의 허점들을 일일이 짚어낸다. 그다음 피드백으로 수정을 거듭해가며 소설을 쓰는 것만 같다. 러프한 초고는 현상에 보이는 사건의 모습이고, 허점은 바로 형사의 시선이 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스토리는 물흐르듯 진행되고, 스토리는 점점 탄탄해져갈 수 있도록 하지는 않을까? 그렇지 않고는 작가가 '지킬 과 하이드'가 아니고서는 전혀 상반된 양극의 심리를 이렇게 치밀하게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로 그가 혼자서 글을 써내려 갔다면 무서우리만치 놀라운 소설가가 아닐 수 없다.
대단한 추리소설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늪에 허리만큼 빠져버린 기분이 든다.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성격의 나는 지금, 그의 원작을 바탕으로 구성된 일본 드라마 <갈릴레오>를 보고 있다. 그가 쓴 작품들이라면 모두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다. 2009년 4월의 작가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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