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잘 만들어진 로드 무비 아니, 로드 소설이다!
연극과 영화를 연출하고 마케팅을 하던 장래의 시나리오 작가가 어느 날 남미로 훌쩍 떠났다. 여행과 영화에 관련된 소재꺼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도착한 곳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그리고 그녀는 그곳 공기에 뭍혀 국적 없는 이방인이 되었다.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억하고, 필름에 담았다. 함께 웃고 함께 고민하며 그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약간은 그을리고 약간은 핼쑥해졌을까. 알 길은 없다. 하지만 필경 떠나기 전보다 사고의 키가 훌쩍 커서 왔을 것이다. 사진을 보며 한동안 머물렀던 남미의 생활을 추억하다가 문득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수십 권씩 서점의 매대에 쏟아지는 자화자찬의 여행기가 쏟아진다. 남과는 다른 곳, 다른 방식으로 멋진 풍경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그 사이에 이야기를 메꾸지만 책을 덮고 나면 한결같이 ‘정말 가서 살고 싶은 곳’ 운운하는 그저 그런 결말로 그치고 만다. 독자들은 사실 작가(유명인이 아니고서야)가 어디를 갔고, 뭘 했고, 뭘 먹었는지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는 관심 없다. 관심사는 단 하나. ‘그곳에 무엇이 있더냐’, ‘정말 가 볼만 하더냐’ 일 뿐이다.
책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그런 일반적인 여행기가 아니다. 로드 무비 아니, 로드 소설이다. 이 책에는 작가가 없다. 대신 저마다 버려야 할, 얻고 싶은 사연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이 있다. 이들이 가진 공통점은 OJ여사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른 여행객이라는 점이다. 주인공들은 나그네가 되고, OJ여사는 주모酒母가 된다. ‘게스트하우스’는 피곤한 나그네들이 하룻밤 신세를 지는 주막인 셈이다.
서울에서 진행중이던 모든 프로젝트를 버려둔 채 갑자기 사라진 연인을 찾아온 OK김, 원하지 않던 불륜의 막장 드라마에 질려 무작정 떠나온 나작가, 여자 부모의 반대로 이제 사랑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원포토, 처자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았다며 마지막 정착지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선택한 박벤처. 그리고 의문의 여인 로사. 주인공들의 사연은 작가의 이야기고 독자들의 이야기다. 생면부지의 이들이 서로를 알게 되고 비슷한 처지임에 위로를 얻게 하는 유일한 플랫폼은 OJ여사다. 그녀 역시 그 누구보다 깊은 사연을 담고 있었지만...그들은 모두 사랑에 취해 있었다. 그 대상이 이성異性이든, 자신이든, 가족이든, 사랑을 되찾으러 헤매고 었었다. 젠장 맞을 사랑, 지구 끝에서도 사람들은 사랑타령을 한다.
영상소설 같은 스토리의 진행은 잘 꿰어 맞춘 육각면체의 큐브처럼 절묘하게 이어진다. 주인공들의 시선이 멈추는 곳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명소이고, 운치 있는 사진들은 설명이 된다(따로 각주를 넣어 설명도 하지만). 컬러풀한 풍경, 뙤약볕의 한낮, 뜨거운 공기, 알코올 냄새와 소움이 그득한 열정의 밤풍경, 그리고 정열적인 사람들. 마치 각각의 주인공들의 한걸음 뒤에서 그를 좇듯 함께 시선이 머물고 함께 취한다. 저자의 유려한 문체는 주인공들의 목소리마저 들리는 듯 했다. 책의 곳곳에 숨은 전면가득한 사진 속에 들어있는 임펙트강한 저자의 생각은 한 편의 광고문구 같이 멋들어진다.
그 중 인상적인 글 하나. “우리는 왜 여행을 하며 방황할까?”라는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을 하는 것 같은 글이다.
“여기가 어디지?”
서울 시내에서 길을 잃었을 때,
우리가 찾는 것들은 항상 정해져 있다.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 삼성동의 코엑스, 신사 사거리 주유소...
불행히도 삶에서는 그런 행운이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위치조차 모르는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을 찾아
끊임없이 떠돌아다닌다. 본문 33 쪽
영화 같은 소설. 작가가 경험한 그곳의 이야기는 글자로 새겨져 내 눈에 들어왔고, 글자는 다시 필름으로 내 머리에 박혔다. 또 한 편의 여행기거니 하고 심드렁하게 읽은 책이어서 뜨거운 남미의 잔향은 더 오래 내 코끝에 머물러 있다.
P.S. 공교롭게도 이 책의 원고가 나오고 이를 바탕으로 ‘영화화’가 결정되었단다. 게다가 저자인 정은선은 그 영화의 PD를 맡고 있단다. OJ 여사의 <게스트하우스>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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