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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인천공항에서 일주일을 머물러 볼까나?
한 사내가 공항에 꼼짝없이 갇혔다. 입국이 허락되지 않아 공항 밖을 나갈 수 없게 되었고, 되돌아가는 것 마저 조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귀국도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사내는 어쩔 수 없이 9개월여를 공항에서 지내게 된다. 이 이야기는 톰 행크스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세 번째로 손을 잡았던 영화 <터미널The Terminal>의 줄거리다.
동유럽의 가상국가인 크라코치아의 국민, 빅터 나보르스키(톰 행크스)는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조국 크라코치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공식적으로 국가로서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이에 따라 자신의 여권과 입국 비자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미국으로 입국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국경이 봉쇄된 조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신세가 된 빅터는 공항 터미널에서 생활하게 된다.
재미있게도 이 영화는 카리미 나세리Karimi Nasseri 라는 이란 남자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라고 한다. 유학을 마치고 1976년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왕정 반대 시위 경력 때문에 추방된다. 그는 필사적으로 망명지를 찾아 헤맸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88년 샤를 드골 공항에 주저앉고 만다. 1999년 프랑스 정부는 보다 못해 그에게 망명자 신분을 주기로 결정했지만 이번엔 그가 거부했고, 스필버그가 [터미널]을 만들면서 준 저작권료 30만 달러를 받은 뒤에도 여전히 공항에서 살기를 고집했다는 후문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09년 한 사내가 터미널로 걸어 들어가 일주일 동안 살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항공사의 달콤한(?) 제안에 의해 ‘자발적 구속’을 한 것이다. 얼핏 들으면 블로그 마케팅을 위해 파워블로거에게 제안을 한 것일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좀 더 파격적이고 거국적이다. 세계적인 히드로 공항Heathrow Airport은 다름 아닌 세계적인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에게 제안한 것이다. 세계적인 작가가 세계적인 공항에서 일주일을 머물렀고, 그 결과물로 한 권의 책이 탄생했으니, <공항에서 일주일A WEEK AT THE AIRPORT>(청미래)이다.
공항은 드나듦이다. 공항은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 그래서 알고 싶은 세상으로 나가는 플랫폼이고, 더 이상 알 필요 없이 이미 익숙한 것으로 돌아오는 귀착지다. 드나듦은 중요한 말이다. 공항에 떠남만이 있다면 무의미해지고 슬퍼지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오기에, 돌아올 곳이 있기에 떠남은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여행이 행복한 이유는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공항은 왠지 어색하고 공허하다. 크기가 너무 큰 때문일 것이다. 드넓고 천정 높은 그곳을 들어가면 빨리 떠나야 될 것 같고, 배웅을 하러 갔다면 얼른 보내고 되돌아가고 싶어진다. 낯설고 불편한 그곳에 알랭 드 보통은 일주일을 있었단다. 그리고 책을 폈단다.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신기하고 놀라운 하나의 사건이었다. 알랭 드 보통이 어느 날 항공사로부터 받은 제안은 이랬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의 회사가 최근에 문학을 관심을 가지게 되어, 런던에서 가장 큰 공항의 두 활주로 사이에 자리 잡은 최신 탑승객 허브인 터미널 5에 작가 한 명을 일주일 동안 초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름도 멋지게 히드로의 첫 상주작가로 불릴 이 작가는 공항 시설의 전제적 느낌을 살핀 뒤, 출발 대합실의 D 구역과 E 구역 사이에 특별히 배치한 책상에서 탑승객과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책을 쓰기 위한 자료를 모으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본문 11쪽
이 글을 읽으며 상상되는 모습은 대합실 통로의 한 가운데 컴퓨터, 그리고 필기도구가 놓인 책상에 의자를 끌어당기고 앉아 공항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다시 글을 쓰는 알랭 드 보통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그의 목에는 공항의 모든 곳을 돌아다닐 수 있는 ‘허가증’ 패찰이 걸려 있을 것이다.
세계적인 작가에게 이러한 제안을 한 항공사도 멋졌지만, 성큼 받아들인 작가도 멋지다. 우리 같았으면 작가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행동이고, 항공사의 얄팍한 상술이라며 또 한동안 난리가 났을 법할만한 사건을 이들은 쿨하게 제안하고 쿨하게 받아들였다. 저자가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유가 책에 들어 있었다.
“이 정신없는 시대에 보통의 경우라면 항공기 착륙 요금이나 유실물 관리에 노력을 집중해야 할 다국적 기업이 이런 드높은 예술적 야망에 기초한 기획을 승인할 만큼 문학이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나 싶어 놀랍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그 사람이 전화로 나에게 매혹적인 만큼이나 막연히 서정적 태도로 말했듯이, 어쩌면 세상에는 오직 작가만이 적당한 언어를 찾아 표현할 수 있는 면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본문 11-12쪽
여행이라는 한 단어만으로 <여행의 기술>(이레)이라는 책 한 권을 쓸 만큼의 능력을 지닌 작가가 알랭 드 보통이 아니던가? 그런 그에게 이런 멋들어진 제안이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 역시 여행차 공항에 있을 때면 자신의 비행기가 온갖 이유로 비행기가 늦어지기를 갈망한 적도 많았던 터라 더할 나위 없었다(차라리 불가항력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공항에서 뭉그적거릴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그 진실은 본임 말고는 모른다. 그가 실제로 항공사의 예술적 야망에 감동했는지, 아니면 그 기획에 대한 보수에 감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박학다식한 그가 자신의 소양을 유감없이 토해낼 만한 대상으로 공항이 적합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가 성큼 수락을 했고 말 그대로 유감없이 자신을 공항 속으로 녹여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해 엄밀하게 말하자면 ‘알랭 드 보통이 만들어낸 한 권짜리 팜플렛’이다. 히드로 공항에서 일주일간 머물면서 공항의 이모저모와 공항에서 상주하며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오가는 여행객들을 살피며 생각나는 바를 적은 두꺼운 책자다. 원래 영화나 소설이 대박을 내서 유명해지면 배경이 되는 곳도 유명해지는 법, 그런데 알랭 드 보통이 히드로 공항에서 자그마치 일주일을 머물며 그곳을 적었으니, 책이 출간된 후 얼마나 유명해졌을까 미루어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 책을 그런 상업적 기획력의 소산물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팜플렛 치고는 읽는 글맛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의 문학작품에도 룸서비스 메뉴만큼 시적인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가을 돌풍이
아사마 산 위
돌들을 따라 불어간다.
일본 에도 시대에 하이쿠 형식을 완숙 단계로 끌어올린 마쓰오 바쇼의 이런 시구조차 소피텔의 케이터링 사업부 어딘가에서 일하는 익명의 장인이 지은 시구에 비하면 단조롭고 환기하는 힘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햇볕에 말린 크렌베리를 곁들인 연한 채소,
삶은 배, 고르곤촐라 치즈
진판델 비네그레트 소스로 무친 설탕 절임 호두“ 본문 27 쪽
식당의 메뉴에서 천정까지, 검색대의 청원 경찰에서 매점의 아가씨까지, 그리고 숱하게 드나드는 생면부지의 여행객들까지 알랭 드 보통의 눈에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글이 되고, 그만의 표현으로 된 글은 내 눈에서 다시 눈에 선한 그림이 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난 한 발 한 발 히드로 공항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책을 읽다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가 된 부분을 발견했다. 지인인 영화번역가 이미도가 부산에서 집필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 책의 한 부분을 예를 들었는데, 그곳을 발견한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가끔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로 딱 적합한 구절이다.
“나의 고용주는 제대로 된 책상을 하나 놓아주겠다고 약속을 지켰다. 사실 이곳은 일을 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다. 이런 곳에서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오히려 그런 ‘어려운 작업 환경’이 글을 쓰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일하기 좋은 곳이 실제로도 좋은 곳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조용하고 시설이 잘 갖추어진 서재는 그 흠 하나 없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실패에 대한 공포를 압도적인 수준으로 높이곤 한다. 독창적인 사고는 수줍은 동물과 비슷하다. 그런 동물이 굴에서 달려 나오게 하려면 때로는 다른 방향, 혼잡한 거리나 터미널 같은 곳을 보고 있어야 한다.“ 본문 77쪽
여행은 여행객에게 있어 환기이고 각성이다. 두려움과 설렘으로 오감이 살아있는 시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순간은 글쓰기에 좋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기 때문이다. 대합실 통로에 책상을 놓고 철저하게 제 3자가 되어 공항이라는 작은 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에게는 일주일의 온전한 그 순간이 여행이었던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공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대목은 그의 공항 예찬론이자,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 이유기도 하다.
“혼돈과 불규칙이 가득한 세계에서 터미널은 우아함과 논리가 지배하는 훌륭하고 흥미로운 피난처로 보인다. 공항 터미널은 현대 문화의 상상력이 넘쳐나는 중심이다. 만약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 -테크놀로지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서부터 자연 파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상호 관계성에서부터 여행을 로맨틱하게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을 깔끔하게 포착한 단 하나의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면, 우리가 당연히 가야할 곳은 공항의 출발과 도착 라운지밖에 없을 것이다.” 본문 16쪽
이 책을 읽었다 해서 그가 본 공항을 눈에 보듯 내가 그릴 수는 없었다. 앞서 말했듯 내게 오래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던 곳이 그곳이라 상상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정반대인 사람들에게 이 책은 어떨까? 영화 <인 디 에어> 속 주인공인 해고대행업자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처럼 미국 전역을 돌아다녀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들이 느끼는 공항은 어떨까? 내가 아침저녁으로 드나드는 논현역 3번 출구처럼 들어서면 설레고 나오면 집에 도착했다는 마음에 푸근한 마음이 드는 그런 정류장 같은 그런 곳이 아닐까?
책장을 덮으면서 시간을 내어 하루 동안 인천국제공항에 머물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가 머물렀던 히드로 공항 아니더라도 책 속의 구구절절을 대신 찾아 느껴보고 싶어졌다(이 정도면 공항을 두려워하는 내게 있어서는 큰 발전이다). 여행을 앞두고 있어 곧 공항에 가야 한다면, <여행의 기술>과 함께 읽기를 권하고 싶다. 그렇다면 알랭 드 보통과 함께 동반여행을 하는 기분을 제공할 것이다.
PS: 남을 따라하는 기분은 들지만 김영하, 박민규, 김연수 같은 소설가가 똑같은 기획으로 인천국제공항에 일주일간 머물면서 책을 써보는 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더 멋진 글이 나오지 않을까? 과연 인천국제공항이 그만한 예술적 감각이 있을 것이며, 그 작가들은 쾌히 승낙을 할까? 생각만으로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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