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키드가 세계적인 오토 디자이너가 되다!
"만약 내가 사람들에게 뭘 원하는지 물었더라면, 사람들은 더 빠른 말을 원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포드자동차의 설립자이자 헨리 포드가 한 말이다. 그는 포드 모델 T를 파격적인 가격으로 제공해 자동차를 부자들의 전유물에서 일반 대중들도 살 수 있는 '모두의 자동차'로 만들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자동차는 속도와 성능으로만 진화했어야 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심미안審美眼 즉, 아름다움을 살피는 안목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속도와 성능으로만 평가되던 자동차에 디자인이 더해졌다. 그러자 '말보다 더 잘 달리는 기계' 정도였던 자동차가 '나의 분신分身'이라 불릴 정도의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오토 디자인 100년 후 미래를 그리다>의 저자 임범석은 자동차에 아름다움을 입히는 디자이너, 아니 아티스트다. 그는 단지 '새롭고 다른 차'를 고안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를 사랑하는 매니아의 입장에서 사용자의 인식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난생 처음 자동차를 본 순간부터 그 매력에 빠진 '자동차 키드'였던 그가 자동차 디자이너가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른다.
"디자인? 자동차를 디자인한단 말이야?’그 기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잡지는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나의 미래를 눈앞에 펼쳐 보여 주는 듯했다. 이전까지 자동차 스케치라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동차는 그저 엔지니어들이 만드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자동차가 디자이너들의 도면에서 태어난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자동차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동안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 모른 채 지냈다.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를 미치도록 좋아했지만 엔지니어나 미캐닉이 되기를 꿈꿨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생각해 보면 관심은 오직디자인에만 집중돼 있었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언제나 자동차의 형태, 스타일링이었다. 나만의 자동차를 상상하며 만들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제야 자동차 디자인이야말로 나의 운명이라는 걸 직감했다." 이 책 103 쪽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논어에 있는 공자의 말씀이다. 이 책은 어린 시절 미니카에 빠져서 자동차 키드로 살다가 자동차 디자이너가 된 호지자好之者 임범석의 '나와 자동차 이야기'다.
저자는 세계 최고의 디자인 명문 아트센터 디자인대학(ACCD: Art Center College of Design)을 졸업했고, 혼다의 미래 콘셉트카를 디자인하는 어드밴스드 스튜디오를 거쳐 현재는 모교인 ACCD에서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거나 자동차 디자이너로서의 기량을 업그레이드하려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자동차 디자인의 하버드, 아트센터의 한국인 최초 정교수이기도 하다. 오토 디자인계에서는 입지적인 위치에 오른 저자의 이면에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민이 서려 있는데, 그의 모든 것이 이 책에 담겼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불광불급(不狂不及)이 떠올랐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인데, 역으로 말하자면 미쳐야 미친다는 의미가 되겠다. 책을 읽는다면 임범석은 '자동차에 미친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벽에 걸린 사나이, 여기서 벽(癖)이란 편집증, 한 곳에 대한 몰입이 지나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어찌 보면 정신병적인 면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다른 이면으로 본다면 한 분야의 정통을 이루어 나가는 집념에 해당되고, 열정을 뜻한다. 그의 자동차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것을 직접 디자인으로 승화시킨 내용들은 1만 시간의 노력이면 천재가 된다는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를 넘어 2만 시간의 노력에 마스터(master, 달인)이 된다는 로버트 그린의 <마스터리의 법칙>을 생각나게 한다.
"기억하라. 반드시 일찍부터 어떤 탁월한 재능이 나타나야만 인생의 과업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당신의 모자라고 불완전한 모습에 가려 한동안 인생의 과업이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이 잘할 수 있는 한두 가지 일에 집중해 노력하다 보면 서서히 그것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사소하더라도 잘하는 것에 반복해 몰두하면, 자기 훈련의 가치를 깨닫고 노력이 가져다주는 보상을 경험할 것이다. 마치 연꽃이 피어나듯, 서서히 쌓이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당신의 능력은 조금씩 바깥으로 펼쳐져 나갈 것이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부여받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라. 그런 사람들은 성실한 노력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때문에 훗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여기서 권고하는 전략은 당신이 실패나 역경을 맞닥뜨렸을 때도 유효하다. 그런 경우, 자신이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한두 가지 일에 집중하면서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 현명하다."
<마스터리의 법칙, 로버트 그린>92~93쪽
임범석은 좋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업業 삼아 자동차 디자인을 자신의 모든 것에 투영시켰다. 인상적인 부분은 자신의 손끝에서 나온 자동차 디자인을 제품으로 만들었던 디자이너가 타사의 다른 사람이 디자인한 자동차 모델들을 자신이 정말로 사랑하는 자동차 모델들이라며 직접 디자인을 그려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그 점만으로도 그는 '자동차 키드' 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는 스포츠 해설가가 된 농구선수 이충희가 훈련이 끝난 후 체육관에 남아 매일 홀로 3,000개의 슛을 쏜 것도, 발레리나 강수진이 하루 19시간씩 연습을 한 것도 그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빠져들어서 였다. 자동차 키드 임범석도 자동차가 좋아서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내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는 최고가 되었다.
힘겹게 산을 오르다 어느새 눈앞에 탁 터진 고원을 만났을 때처럼 내가 속한 분야의 ‘큰 그림’이 한 눈에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야구에서 타격감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종종 ‘야구공이 농구공이나 수박만 하게 보인다’고 하는 그런 경지. 그와 같은 ‘시야의 확장’ 경험을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연주를 할 때 더 이상 악보나 음악의 일부분에 신경을 쓸 필요 없이 곡의 전체 구조를 보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
바로 통찰력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이런 ‘마스터리’를 가리켜 ‘도(道)’라고도 부른다. 오랜 수행 끝에 얻어지는 득도의 경지. 모든 것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응축되어 기술과 경험을 자유자재로 끌어 쓰게 되는 순간,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부분이 아닌 ‘전체를 느끼는 감각’을 얻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 역시 자신의 뒤를 이은 차세대 자동차 키드를 길러내는 선생으로서, 마스터로서 자동차의 미래도 그려냈다. 각설하고, 그가 사랑한 그린 추억의 명차와 직접 디자인했던 콘셉트카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페이지마다 눈이 즐겁고 행복했다. 앞으로 아름다운 자동차를 만날 때 마다 '임범석'을 떠올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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