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텁지근한 오후, 미용실을 찾았다.
올 여름엔 꼭 버텨서 가을엔 긴머리를 갖고 싶었는데,
늘 그렇듯이 한여름에 결국 손을 들어버렸다.
퍼머약을 잔뜩 바르고, 타올을 덮고, 비닐을 씌워서는
열을 내는 듯 벌거스름한 세발 회전기계에 머리를 맞긴 아가씨가
무심히 껌을 씹으며 잡지를 보고 있었다.
이 계절, 이 이시간에 난 돈을 주고 하라고 해도
절대로 하지 못할 엄청난 일을 무던히 하고 있었다.
대단해..
'어머, 어소오셰요~~~'
베이스톤에 아다지오의 속도로 들리는 원장선생의 목소리.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게이일거라는 생각을 항상 한다.
아니면 말구..
'모리..기르신다면서..어떻게 하실료구~~?'
은근히 기르지 못할 것을 알았다는 듯한 뉘앙스가 빈정상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차마 듣고 싶은 않은 말이었을지도...
" 짧게 예쁘게, 영계처럼..."
턱없다는 듯 뜨악하는 원장의 표정을 애써 무시했다.
언젠가부터 커트를 하면 항상 끝에 하는 말이다.
'영계처럼...'
'내 것'에 관해서는 꽤(?) 조리있게 해결하는 편인데
젬병인 것 몇 개중 하나가 바로 머리를 맡길 때다.
비슷한 것이 바로 혼자서 여자에게 선물할 물건을 쇼핑할 때가 그때다.
제일 좋은 방법은 함께 동행하면서, 아니 쫓아다니면서 짐들어주고,
'이거 어때?'라며 묻는 말에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물건을 골랐네?'
라는 표정으로 눈을 지긋이 감으며 미소를 보여주고,
그녀가 맘을 굳혔을 때는 다른 물건으로 바꿀 맘이 생기기 전에
얼른 지갑을 열어 계산해버리는 눈치만 있으면 되지만,
말 그대로 '서프라이즈'하게 선물을 해야 할 때가 바로 그때다.
화장품을 살 때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무조건 제일 비싼 곳을 찾는다.
이것 저것 재볼 것 없다. 재볼 수도 없고.
백화점 여성화장품 코너를 진입함과 동시에 수많은 향에 취해
연신 코끝이 간질거려서 재채기 직전 상황이 되고, 그 쯤되면
판단력은 백화점밖에서 기다리게 된다.
제일 친절해 보이는 여직원에게 말한다.
'요즘 제일 잘 팔리는 거 주세요.~'
애인이 바른 것의 <삼분의 이>는 내가 먹는다는 립스틱을 살 때에 있어서는
내용물에 대해 엄선할 필요가 있을 법 한데...마찬가지로 같은 요구를 한다.
'제일 잘팔리는 색상으로 주세요~'
종류는 왜 이리 많은지...
그리고 곧 죽어도 함께 사야 하는 물건들이라면서 왜 그리 권하는지...
항상 예산을 초과하는 선물중 하나다.
말이 샜다, 오늘은 내머리 이야기.
한 번은 맘에 드는 스타일의 머리를 한 배우의 사진을
오려서 '이렇게~'해달라고 했다가 머리형, 모발이 전혀 다른데
불가능하다며 난색을 표하는 미용사의 거절에 기죽은 이후로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늘 하는 소리는 '보기 조오케~~잘 부탁합니다' ㅡ,.ㅡ
그나마 삼 년째 게이스러운 원장에게 머리를 맡기면서
멘트가 바뀐 것이다. '영계처럼~'
결과는 항상 막 제대한 군바리가 유행을 쫓아 깎아낸 대갈통이 되지만
기계를 대지 않고, 스타일도 잘 변하지 않는다면서 주위의 칭찬이 있어서
내심 흡족해 하는 편이다.
어짜피 일주일 후면 제 눈에 익어버려 그리 흉물스럽지 않은게 머리꼴아니던가.
문제는 커트후에 일어났다.
늘 원장이 샴푸를 해 줬는데, 오늘은 새로온 듯한 아가씨가 감겨준다는 것이다.
여자직원이 머리를 감겨주면 긴장이 되서 목에 잔뜩 힘을 주게 되고,
자연히 모가지가 제대로 젖혀지지 않아, 샴푸한 물이 항상 등을 적시기 때문이다.
'긴장 푸세요~~'
몇 번인가를 여직원이 말을 했지만...
내게는 '아침에 기상하면 흉물스러우니 텐트치지 마세요'라는 말처럼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샴푸후.
어김없이 셔츠는 펑 젖어버렸다.
여직원은 죄없이 미안해했고, 난 썩은미소로 괜찮다 연신 손사레를 쳤다.
'익숙할 나이 됐구만...'
모가지는 뻣뻣해 깁스를 한 것같고, 등허리는 축축하다.
머리를 어떻게 말렸는지, 스타일링을 했는지 기억도 없다.
얼른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애꿎은 여직원에게 팁을 주고 나왔다.
큰 관문하나 넘긴 기분.
4주 동안은 등 젖을 일은 없겠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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