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현실을 잊고 잠시 다녀온 '추억여행'같은 소설!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가 누가 내게 묻는다면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말할테다. 왜 하필 그 시절이냐고 되묻는다면 좀 더 열심히 공부해 세상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일류대학에 들어가 최고의 직업을 갖고 사는 엘리트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추호도 생각이 없지만(사실은 다시 돌아가도 그만큼 할 영민하지도, 노력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더 잘 안다), 최소한 점수에 맞춰 생전 처음 들어본 학과(사실은 전공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없었다. '의예과'가 '의상예술과'로 알았고, '낙성대'라는 대학이 있나 할 정도 였으니까)에 구겨 넣듯 들어가 그 전공으로 지금까지 업業으로 살고 있는 현실을 바꾸어 보고 싶은 미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랬다면 바뀌었을지도 몰라'라는 팍팍한 현실이 투영된 자기위로의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사실은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기에 되돌이표를 만들어서라도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물고 싶어서다.
나는 그시절 이런 저런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고등학교 3년을 '강릉'에서 혼자서 보내게 되었다. 신통하게도 시험을 봐서 들어가는 제법 성적이 우수한 고등학교를 맨 꼴찌로 간신히 들어갔는데, 대학진학에 있어 좋은 기회를 얻었다는 기쁨 보다는 '독립의 기쁨'이 더 컸던 것같다. 공부는 뒷전으로 두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을 아는데 시간을 보냈다. 가장 싼 자취방을 얻고, 다달이 보내오는 하숙비와의 차익을 용돈 삼아 세상을 둘러보려고 노력했다. 그곳은 산과 바다가 가까이에 있어 주말이면 둘 중 어느 한 곳에 머물렀고, 하교길엔 통털어 세 군데 의 극장을 모두 섭렵하고 다녔고, 매일 친구들과 꽁초담배를 나눠피며 함께 하며 지냈다. 시험기간이 오면 생활비가 끊길까 두려워 각성제를 먹어가며 죽을 둥 살 둥 벼락치기 시험을 치뤘고, 고3 여름 방학땐 양양에 있는 소금강의 어느 절에서 한달간 시험준비를 했다. 되돌아가 가고 싶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자신에게 대해서는 '혼자'라는 단어를 절실하게 느꼈던 시간이었고, 친구들과 함께 할 때는 '우리'라는 말의 뜻을 알게 되었고, 책과 영화를 좋아하게 된 시기도 그 때 였다. 무엇보다 시리도록 가슴아픈 사랑의 기억을 갖게 된 그 시절이 그립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꼭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새카만 교복, 목둘레의 플라스틱 커버, 황금색 단추, 삐딱하게 눌러쓴 찌그러진 모자, 옆에 찼다고 해야 어울리는 국방색 가방 그리고 누렇게 때묻은 헝겊 운동화 차림의 3센치 상고머리에 바람맞은 듯 선 이마, 분화구처럼 솟은 여드름 투성이의 사내 여섯명. 그리고 단아한 여학생의 그림이 새겨진 소설책의 표지를 봤을 때, 그 시절이 생각났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설계의 대가라고는 하지만, 짐작 보다 위엄이 있지도 않고, 늘 마흔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듯한 젊은 소설가 최인호씨가 쓴 책이란다. 화려하고 사연많은 학창시절을 보낸 것으로도 유명한 그가 그 시절로 돌아가 쏟아놓은 이야기가 궁금했다. 재미있는 제목, '머저리 클럽'이다.
주인공 동순이와 그의 다섯 친구 그리고 샛별회 여학생들과의 삼 년의 학창시절 이야기는 나와 닮았다. 그리고 거나하게 술이 되시는 날이면 옛 앨범을 펼치며 꺼내놓은 우리 아부지의 이야기와도 닮았다. 세대도 장소도 다르지만 아이도 어른도 아닌 '미성년자'를 보냈던 사람들은 하나로 귀결되는 가보다. 하루 속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듯, 작은 일에 일희일비했던 가장 순수한 시절. 보는 것, 느끼는 것이 모두 새로워 감당하지 못해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 빛 바랜 사진이 누렇게 느껴질수록 그들의 대화와 생각은 순수한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저녁 한기가 스며들어도 꼼짝하지 않고 방 안의 불을 끈 채 저녁 생각도 잊고 앉아 있었다. 모든 생각이 생소해지고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이 저녁은 어제의 저녁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나에게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켜지는 갓스탠드의 은밀한 불빛도 예사 불빛이 아니다. 이제 내게는 바람에 흔들이는 나뭇가지 하나도 예사 나뭇가지가 아니다. 지금 이 무사무사無事無事 의 순간, 저 옆집에서 혀를 빼물고 짖는 개소리도 예사소리가 아닌 것이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속삭임, 가려움, 세탁비누, 재떨이, 학교 거리에 흩어진 많은 담배꽁초 같은 것도 예사 것이 아니다. 비온 뒤, 나뭇잎의 색깔이 순간 밝은 색조를 띠고 밝아오는 것처럼 이 모든 사물은 새롭게 새롭게 날카롭고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내게 달려드는 것이다. 아아, 신기하다." (P 75)
나 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학생을 달리 느꼈을 때 '사랑'을 직감했다. 늘 나와 함께 했던 시간과 공간이 예전과 다름을 느끼고 동순은 신기함을 느꼈지만, 나는 당황해서 울었다.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벌렁대는 심장을 안고. 너무나 좋아해서 차마 고백하지 못하는 동순에게는 세상을 모두 아는 듯한 영민이 있었지만(그래서 그가 채갔는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없었다. 숱한 날을 편지를 쓰며 보냈고, 부치지 못한 채 남겨두었다. 그때 난 사랑의 감정을 가졌다고 기뻐했을까? 이루지 못했다고 슬펐을까? 오롯이 기억해 낼 수 없을 만큼의 기억력에 난 고마워해야 할까? 1945년에 나서 지금껏 살아온 그가 모든 것을 눈에 선한 듯 조금 전에 느낀 듯 그려내듯 펼쳐내는 그의 글을 읽으며 '타고난 이야기꾼'임을 새삼 느끼게 되고, 퇴색되지 않은 순수함이 묻어 있는 글들을 보면 아직 고등학생을 벗지 못한 것도 같았다. 그의 생생한 기억력에, 아직 남아 있는 순수함에, 글을 읽는 만큼은 이십 여년 전의 옛날로 되돌리게 하는 흡인력에 한없는 질투를 읽는 내내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화면이 떠오르는 건 영화 '고교얄개(1976)' 였다. 두수(이승현분), 영호(진유영분), 호철(김정훈분), 인숙(강주희분) 등의 단짝 친구들이 펼치는 좌충우돌 고교생들의 청춘물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는데, 세월이 지나 내가 초등학교 때까지 명절 때 TV에서 다시 보여줘 봤던 기억이 있다. 다행히 지난 4월 조그마한 극장에서 재상영해 쫓아가 본 덕에 이 기억도 할 수 있었으리라. 영화속 대화의 산파조의 억양은 글 속의 뉘앙스와 닮았다. 머저리 클럽의 악동들이 펼치는 배꼽잡는 에피소드와 그들의 대화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머저리 클럽'의 동순과 영민은 '고교얄개'의 호철과 두수를 떠올리게 했다.
이 소설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한없이 밝다'는 것이다. 어둡고, 침울했던 197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했으면서도, 시대를 살피기보다는 순수하게 개인에게 몰두했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세상돌아가는 것 모르고 그 시절을 세상을 느끼지 못하고 내 눈에 비치는 세상을 보며 나를 위해 보낸 것처럼 주인공들은 자신과 친구들에게만 시선이 고정된 점이 더욱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는 모두가 내가 겪고 이야기했던 것들이었다. 어느 때부터 인가 내가 잊었던 다시 없어 소중한 그 시절의 고민과 생각들이 들어 있었다. 호탕하고 남자다운 능구렁이 영민을 보면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대학생인양 고려대학교 마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안암동 대포집에서 친구들 한가운데서 술을 마셨던 치기어린 머저리, 울 아부지가 보였고, 소심하고 생각만 많은 바보 동순이를 보면, 그시절의 머저리인 내가 보였다. 내 친구의 이야기도 있었고, 울 엄니의 클럽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80년대에 있어야 할 동순의 누나 방에 있는 리쳐드 기어의 브로마이드와 음악다방에서 들렸던 '이선희의 J에게' 가 어색하지 않다. 그 속에 내가 겪었고, 알았던 이야기가 들어있음에 오히려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작가의 기억력도 완벽하지는 않는다는 안심도 함께). 하수상한 현실을 잠시 잊고 다녀온 추억여행같았다. 밝고, 즐거운 소설.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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