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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모음 - Readingworks/소설·비소설·인문·

엑스트라로 살고 있는 진정한 영웅, 아버지를 이야기한 소설!

by Richboy 2008. 9. 11.

 

이별을 잃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영광 (팬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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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로 살고 있는 진정한 영웅, 아버지를 이야기한 소설!

 
  범죄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클라이막스 무렵, 형사는 자신들로는 부족해 지원요청을 하고 범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한 무더기의 경찰들이 도착하자, 그들에게 팀을 나눠 전후방을 맞게 하고 정면에서 엄호를 지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거기 몇 명, 날 따라와." 범인이 숨어 있는 건물의 문앞. 주인공인 형사는 몇 명의 경찰들에게 문을 따고 먼저 들어가라고 한다. 경찰1 과 경찰2 는 문앞에서 문을 따려고 하는 순간, 악당들은 문에 대고 총을 난사해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지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죽어버린다.
 
 '한 명의 영웅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산만큼 높이 쌓인 이름없는 병사들의 주검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고 이야기했던가?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종종 그들을 주목하곤 했다. 총은 커녕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몇 초 만에 죽어버리는 엑스트라 인생들. 영화속 이야기라 주인공은 범인은, 또 관객은 주인공을 따라 눈을 돌리겠지만, 소리없이 죽어간 그들도 삶이 인생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곤 했다. 그 누구의 아들이자 남편, 그리고 아빠일 그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박영광의 소설 [이별을 잃다]가 바로 그런 어느 이름없는 형사의 이야기다.
 
 이 소설을 쓴 작가가 실제로 현직 형사에 근무중이며 지방의 경찰서에서 수사과에 재직하고 있는터라 사건과 수사상황을 둘러싼 주인공의 활동은 어느 다큐멘터리나 영화 못지 않게 리얼하고 스피디하게 전개 된다. 또한 독특한 구성이 매력적인데 책의 시작과 함께 주인공이 죽게 되는 다소 황당한 구성을 목격하게 되는데, 멋지게도 이 책을 모두 읽는 순간까지 주인공은 죽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간다. 스토리도 장르를 딱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형사라는 직업을 가진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라고 보기에도 충분하지만, 범죄현장에서 범인을 추적하고 체포하는 과정에서는 어느 추리소설보다 박진감과 스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형사라는 직업은 원래 말보다는 행동이, 그리고 생각이 많아야 하는 직업이듯, 저자가 일을 하면서 느끼는 평소의 생각과 애환이 곳곳에서 짙은 향을 피운다. 이를테면 저자 스스로가 언제 나타날 지 모르는 범인을 기다리며 아내와 아이를 생각했던 것처럼,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했던 수많은 작지만 소중한 생각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슈퍼 일을 계속했다. 결혼하면 힘든 일 같은 거 절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그것 또한 거짓말이 되어 버렸다. 우리 둘이 일을 마치고 팔짱을 끼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고, 가끔 등에 업고 걸을 때 누가 볼까 내려 달라고 조르는 것이 매우 예뻤다. 나는 힘들다고 헉헉댔지만, 사실 힘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하면 아내가 웃는다. 나도 따라 웃었다. 가로등도 추워 오들오들 떠는 골목길도 개들조차 입김을 내며 집으로 돌아간 쓸쓸한 거리도 우리에겐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보다 더 아름답고 따뜻했다."   (p55)
 
 한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아 잘 자라서 경찰이 되었고, 순찰을 돌다 컵라면을 먹으러 우연히 들린 슈퍼에서 평범한 처녀를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다. 어느덧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나는 사회의 파렴치들을 잡는 형사가 된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갖고 나누고 싶지만, 형사라는 직업은 그를 늘 밖에서 떠돌게 된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에서 적에게는 송곳니를 날카롭게 세우지만, 한 겨울 하루종일 사냥을 해 새끼를 먹이고는 자신은 물로 배를 채우는 '늑대 한마리'를 생각나게 한다. 몸은 떠나 있지만, 항상 마음만은 함께 하는 주인공의 그것은 이세상을 사는 아버지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족의 가장으로서 갈등하는 모습과 떨어져 있으며 가족을 그리는 모습은 실제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듯 잔잔하고 리얼하게 내 마음으로 전해진다.
 
"나를 닮은 사람이면 좋겠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면 좋겠다.
나를 닮아 당신과 아이들이 쉽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고,
나를 닮지 않아 쉽게 나를 잊어버리면 좋겠어.
그래야 해. 힘들겠지만 그래야 해.
내가 잊을게. 나는 그냥 당신 곁을 잠시 지나갔던 사람처럼,
나는 그때 한 번 담배를 사러 갔던 사람이고,
당신은 어쩌다 단 한 번 나에게 담배를 팔았던 사람이라고.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p268)
 
영화 [사랑과 영혼]을 연상하듯 주인공인 나는 죽었지만 채 죽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되어 자신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혼자서 이야기한다. 저자의 직업이 형사인 만큼 누구보다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상황'을 그림자처럼 달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인 듯 같아 마치 '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는 그의 애잔한 마음을 나타내는 글을 읽을 때는 김현승님의 시, [아버지의 마음]이 떠올리게 했다.
  
 예전에 소설가를 꿈꾸는 선배가 한 말이 생각난다.
"너, 이 세상에서 가장 아이러니컬한 직업이 뭔지 아냐?"
"뭐지?"
 "그것도 몰라? 소설가지. 허가받은 거짓말쟁이들 말이야.
거짓말을 잘 할수록 칭찬받잖냐."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양식' 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소설을 읽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테다. 시간이 펑펑 남아돌아서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이 미안한 자신에 위로를 주고 싶어서 일 수도 있고, 중학교 여학생이 멋진 교생선생님을 만난 듯 한 저자에 빠져 그를 추적하고 싶어서 일 수도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기 바빠 자기계발을 못한 이들의 유일하고 따뜻한 안식처일 수도 있고, 잠시라도 활자를 눈에 넣지 않으면 안되는 활자중독자에겐 치료제가 될 수도 있다. 이유는 많겠지만, 독자들이 소설을 읽고자 하는 공통된 목적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이 말을 하자니 한편으로는 외롭다는 뉘앙스를 갖는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잘하는 작가를 만나면 독자들도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런 작가의 책을 만나면 깊이 빠져서 시간과 자리를 잊곤 하는데, 어제 만난 이 소설이 그랬다. 이야기속 자신의 모습은 영화의 이름없는 엑스트라였는지 모르지만,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멋진 아버지요, 가슴 뜨거운 로맨티스트였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아버지 역시 위대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