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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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책과 함께 놀고 있는 어느 할아버지의 이야기!
"할아버지, 뭐해?"
뭐하긴 뭐해? 책 읽지.
"책 그게 뭔데? 그렇게 재미있어?"
그럼, 재미있고 말고. 얼마나 재미있는지
책을 읽다 보면 잠도 잊고, 밥도 잊는 걸?
"우와!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그럼 책 이야기 해 줘."
책 이야기라...좋아. 이 할애비가 해 주지.
이바구 떼바구 강떼바구...
나이 칠십 하고도 절반을 넘게 산 할아버지가 자기의 가장 친구 이야기를 한다. 그 친구는 손으로 마루바닥을 치며 배가 아프도록 웃음을 주는가 하면, 신새벽 남에게 들킬까봐 이불자락을 깨물며 끄억끄억 눈물을 빼기도 하고, 인생의 진리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고결한 사랑의 참맛도 느끼게도 한다. 할아버지의 친구는 책이다. 주인공인 할아버지는 다름아닌 '한국학'의 석학으로 잘 알려진 독서가 김열규 교수이고, 칠십 평생 함께 한 친구인 책을 [독서讀書]를 통해 이야기했다. 그는 책 읽기, 즉 독서에 대해 '삶이자, 앎이고, 배움이다'고 이 책에서 정의하고 있다.
"인생에는 무수한 가닥 길이 나 있다...인생은 '모름'으로 시작해서 '모름'으로 이어지고 또 이어지곤 한다. 모르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일지도 모른다...삶은 앎이 되려고 무진, 무진 애를 쓴다...삶은 앎을 향한 행보行步이다. 아니 아예 삶을 앎이라고 해두는게 좋을 것 같다...읽기는 나를 위해서 세계 속으로 길을 안내해준다. 그래서 읽기는 아직 잘 모르는 삶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나침반이 되고 이정표가 된다...독서讀書는 삶이자 앎이자 배움이다."
김열규 할아버지에게 책은 나무의 다른 모습인 종이로 엮은 것들 만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무릎팍에 누워 듣는 '이바구'도 책이 되고, 어머니가 제사날에 가신 분을 기리는 '제문'도 책이 되었다. 교회에서 들려주는 듣기 교실도 책이었던 것을 보면 할아버지에게 있어 책은 이야기로 된 모든 것이었다. '사람이 말해주는 사람사는 세상의 이야기'가 '책' 아니던가? 어릴 적 할아버지는 책을 듣고 자랐다.
소학교에 들어가 배운 글자는 가나문자인 일본어. 하지만 사관과 주체의식이 있을 리 만무한 소년 김열규에게는 그 어느 문자였더라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기쁨 하나였으리라. 그에게도 문자가 있는 유사有史시대가 열린다. 소리내어 읽고, 외워 읽고, 누워 읽고, 책상앞에서 책상다리로 읽었다. 일본인이 만든 일본 이야기를 일본글로 읽으며 그는 삶의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더욱 깊이 책에 빠지게 된다. 소년이야 태어난 제 땅이 남의 나라에 속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오늘날 인성이 채 길러지지도 않은 어린 아헤들을 돈보따리 싸매어 일부러 파란 눈의 나라로 보내서는 자랑하는 판국이니 소년을 두고 안타깝다고 말할 것도 없겠다.
"정말 탐독했다. 정신이 나가고 넋이 나가도록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위대한 정신을 읽어내고 위대한 영혼을 읽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어슴푸레 하게나마 들곤 했다. 그때 읽은 그들의 작품 대부분은 지금도 그 느낌은 물론이고 줄거리까지 훤하게 기억난다."
광복 후 소년이 도떼기시장에서 흘러 나온 책들에 탐독하게 되는데, 책의 저자들이 하나같이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한스 카로사, 앙드레 지드, 아나톨 프랑스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문호들의 고전들이다. 필자에게 언급된 저자들의 책들을 읽었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몇 권 뿐이다. 그렇다면 이 소년을 부러워해야 할까? 그 또한 아니다. 지금처럼 낙점을 기다리는 수만 권의 책들이 쌓인 보물섬이 그득그득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소년은 없어서 못 읽었고, 안줘서 못 읽었건만 책장에 켜켜이 쌓인 책들을 두고도 '읽을 시간이 없다'고 애써 위로 하며 외면하는 필자가 부끄러워진다. 저자의 소년시절이 오늘날이었다면 어떠했을까? 과연 더 많이 읽었을까? 얄궃은 질문도 던져 본 부분이었다.
"읽기 반, 생각 반, 그런 읽기를 계속하다 보면, 책을 자주자주 엎어두어야 했다. 팔짱 끼고 고개 숙이고 눈 감고 침사沈思에 빠져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책을 읽다가 어느덧 빠져드는 꿀맛 같은 잠! 그건 단상집이나 명상집에서 얻을 수 있는 엉뚱한 수확이었다. 그 쾌적한 수면제, 단잠을 불러오는 달콤한 수면제! 그 때문에도 단상집이나 명상집은 모두 명작이고 걸작이 아닐 수 없었다."
저자는 단상집斷想集 읽기를 쾌적한 수면제로 비유하며 책을 읽다가 잠드는 나른한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한여름 낮에 모시 속옷을 입고 사방 뚫린 대청마루에 턱을 괴고 책읽다가 간간히 불어 속살 만지고 가는 산바람에 소름 떨며 잠에 빠진 경험을 한 사람들을 알리라. 대여섯 살 아헤가 밥든 수저를 들고 단잠에 빠진 그 형국과 다름없다. 책은 때로 최고의 수면제가 되기도 한다며 할아버지는 그 또한 책 읽기의 맛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번죽도 좋으시다.
할아버지의 칠십여 년의 세월만큼이나 책읽기의 방법도 다양하고, 그 방법마다 나는 책읽는 맛 또한 쏠쏠함을 이 책에서 구할 수 있었다. 친한 친구가 있다. 손 뻗으면 나타나고, 원한다면 하루 종일 만날 수 있고, 만날 때 마다 다른 이야기를 해주며 둘이 낄낄깔깔 댄다면, 그런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와 함께 함은 무엇일까? 놀이다. 할아버지의 책읽기는 책과 함께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는 놀이 즉, 소요유逍遙遊 라고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느 책이 말하듯 '학문의 보고'이고 '선사의 말씀'이고 '지식의 창고'가 아닌 그저 편한 '친구'라고 말씀하신다. 배움에는 지침이 있지만, 친구와의 놀이는 지칠 줄 모른다. 배우고, 느끼고, 공감하는 책읽기를 '친구와 함께 하는 놀이'쯤으로 여겼으니 평생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할아버지가 책과 함께 제대로 놀았고, 지금도 놀고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는 곳이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내 것이 되어버린 책들 - 작품 읽기'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체호프의 [내기],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릴케의 [말테의 수기],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빈스무스 전기] 등 그가 사랑하다 못해 제 것이 되어버린 책들은 하나같이 대문호의 위대한 작품들. 하지만 그는 마치 시골 마을의 농부가 소꼽친구였던 대통령을 소개하듯 아무렇지 않게 작품을 논하고 평하고 있다. 온전히 제 몸을 책 속에 던지지 않았다면 나오지 못한 글들, 서평을 쓰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보물이다.
"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나의 세계는 하나씩 늘어갔다. 나는 이미 점이 아니었다. 나의 존재성은 점으로 찍히고 말 것은 아니었다. 나는 좀 더 넓은 무엇인가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내가 읽는 작품 속의 세계는 모두 나의 영지고 영토가 되어갔다. 나의 존재는 드넓은 공간, 확대된 공간으로 그 영역을 넓혀갔다. 그건 훗날 대학에 가서 읽게 된 릴케Rainer Maria Rilke의 말대로 나의 '순수 공간'이고, 나만의 '세계 내 공간'이었다.
숲과 호수, 그 자연 속에 작품이 있었다. 나 또한 다만 '읽는 자'로서 자연 속에 있었다. 어느새 읽는 일이 사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변해가는 세상에 '시간을 잊고 책읽기'가 시대를 역행하는 '짓'은 아닐까 고민하곤 했다. 필자가 한 권의 책이 보여주는 세상에 탐닉하는 만큼 세상을 등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걱정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열규 할아버지는 '책을 읽는 것이 나라는 존재의 공간을 넓히는 행위'라고 말씀해 주신다. 무리 속의 '내'가 아니라, 스스로 선 '내'가 택한 세상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2050년의 미래를 이야기한 리처드 왓슨의 책 [퓨처 파일Future Files]에서 이야기한 책의 미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책의 장르와 책을 읽는 방법은 바뀔 수 있지만 지금 보다 다양한 책이 쏟아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오늘날 세상은 '스토리'가 있는 제품을 사랑하고, '스토리텔링'이 도입되어야 시선을 끌 수 있다. 세상이 디지털화 될수록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보다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싶어서는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은 영원할 것이고, 책읽기는 세상을 읽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세상에 뿌려진 책과 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책과 보다 잘, 보다 재미있게 노는 방법은 이 책이 말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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