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거인으로부터 고전과 교양의 의미를 듣다
“저는 대학 때 읽은 책의 80%가 소설이었습니다. 그러다 문예춘추에 입사했고, 그 이후 소설읽기를 그만두었어요. 처음 배속된 곳이 <주간 분슈운(週刊文春)>이었는데 당시 상사가 소설만 읽으면 안 된다고 충고를 해서 그때부터 소설 이외의 책들을 읽기 시작한 거죠. 그러자 제 자신이 얼마나 현실을 몰랐던가를 통감하겠더군요.(웃음) 허구보다 현실이 더 흥미진진했어요. 그 이후 소설에서 멀어졌어요.”
나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가 소설 혐오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의 직업이 논픽션 저널리스트이고 어느 인터뷰에서 “내가 죽을 때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읽은 적이 있기에 난 그런 줄로만 알았었다. 왕팬을 자처하면서 큰 오해를 할 뻔 했다 싶어 다행이었고, 그도 학창시절에는 소설을 읽으며 흥미로운 허구의 세계에 빠졌다는 사실은 그의 독서여정에도 변곡점이 있었구나 싶어 내게 가벼운 안도감을 준다. 오랜만에 지식의 거인을 만났다. <지의 정원知の 庭園>(예문)을 읽었다.
이 책은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독서광 두 명이 펼치는 일종의 대담집이다. 지의 거인으로 알려진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와 지의 괴물로 알려진 사토 마사루佐藤優, 일본의 대표적인 두 명은 책이 인간의 역사에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시대와 지성, 교양과 독서의 힘을 이야기한다. 각자가 읽었던 책 중에서 교양을 위해서라면 읽어야 할 필독서 총 400권을 소개하고 비평한다. 원제목은 『ぼくらの頭脳の鍛え方, 우리의 두뇌를 연마하는 방법』이다.
책을 펴는 순간 나는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테이블 뒤에서 방청하는 관객이 된다. 두 사람의 대화 중 거론되는 책의 절반 이상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책들이었다(대화중 소개한 책 상당수가 국내에는 출간조차 되지 않은 책들이다). 하지만 이미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나 <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 등을 읽은 터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책’을 대하기는 낯설지 않다. 나는 관심조차 없던 책, 그래서 나중에라도 읽지 않을 책이기에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훑어 나갔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알고자 하는 것은 ‘책 제목과 짧은 책 소개’가 아니다. 처음 만나는 인물인 사토 마사루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아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며 책과 세계를 향한 지적 긴장을 늦추지 않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관을 조금이라도 더 엿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고전은 모든 지식의 기반이 되는 역할을 합니다. 다른 사람과 어떤 주제를 놓고 이야기할 경우 전제나 배경이 되는 지식이 없으면 내실 있는 논의가 불가능한데, 그때 전제나 배경이 되는 것이 바로 고전입니다. 단, 고전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군요. 메이지 시대에는 메이지 시대의 고전이, 현대에는 현대의 고전이 존재합니다.”
다치바나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고전을 읽을 필요는 없다. 최신 잡지나 학술서를 읽으면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최소한의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전제하에 한 이야기다. 근원에 접근하기 위해 고전을 대하는 태도는 높이 평가하지만, 고전에 탐닉하는 것을 경계했다. 제대로 익히기 위한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 고전은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한편 다치바나가 생각하는 교양은 무엇일까?
“교양은 다른 말로 하면 인류의 지적 유산입니다. 그래서 교양 교육은 지적 유산의 재산목록을 가르치는 것이 됩니다. 지식의 전체상을 그리도록 하고, 지의 세계의 끝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 지점으로 학생을 데리고 가는 것이 교양 교육이라고 봅니다. …… 현대사회에서 교양이라는 말은 점차 죽은 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만 권의 책을 읽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결국 일생에서 최대의 성과를 얻으려면, 생의 남은 시간을 확인하면서 계획을 세우는 수밖에 없지요. 그때 지식의 계통수를 머릿속에 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역시 종이 매체에 쓰인 것을 읽는, 즉 독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그렇게 해서 뇌를 발달시켰기 때문이지요.”
그는 ‘교양’을 어떤 세트로 이루어진 지식이라고 보는 것을 경계했다. 또한 교양을 익히기 위한 속성법이 있는 줄 아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다치바나는 교양을 ‘개인의 정신적 자기 형성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모든 이념의 총체’라고 정의하며 부연의 말을 더했다.
“독일에서는 실학을 ‘빵을 위한 학문’이라고 하는데, 교양은 빵을 위한 학문이 아닙니다. 교양은 실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지는 않아도 ‘모르면 부끄러운 지식의 총체’, ‘각계에서 교양인이라 간주되는 사람들과 당당하게 지속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지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이 추천하는 책을 꼭 읽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국내에는 발행되지 않은 책들이 많아서 그조차도 불가능하다. 두 독서광이 추천하는 책 400권은 리스트와 함께 추천에 대한 짧은 변(辯)이 첨부되어 있다. ‘세 줄 서평’이라 해도 될 법한 이 글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가치는 충분했다.
"책을 무척 좋아하는 두 형제를 알고 있다. 어느 날 동생네 사무실에 놀러갔더니 책상에 놓여 있는 책 한 권을 가리키며 이 친구 하는 말이 형이 훔쳐가서 또 한 권을 산 것이란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이 친구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 책을 가방 속에 넣고 사무실을 나와 문자를 보냈다. ”한 권 더 사라.““
정제원의 <죽도록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를 읽다가 이 글귀에 한바탕 웃었다. 보름 전 나는 이 책을 집어오면서 동생에게 똑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장거리 기차여행길에 오르면서 편하게 읽으려고 집어 들었다가 바로 덮고는 집으로 돌아와 필기구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 다시 책을 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아 이문재 시인이 쓴 ‘척추로 읽읍시다’라는 제목의 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척추를 곧추 세우고, 다시 말해 온몸과 마음을 집중해 읽은 책이 한두 권 있다면, 당신은 책 속에서 이미 길을 찾았을 것이고, 또 그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갔을 것입니다. 책을 몇 권 읽었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척추를 곧추 세우고 읽은 책이, 또는 그런 자세로 읽고 싶은 책이 과연 몇 권이 있는지가 책 읽기의 핵심입니다. 척추로 읽는 책이 진짜 책이다."
이 글을 읽는 미래의 독자 역시 이 책을 어디서 읽든 자세만큼은 척추를 곧추세운 정좌의 독서를 해야 할 것이다. 내게 400 권의 리스트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난 지식의 거인에게서 고전과 교양을 읽어야 하는 이 책을 통해 배웠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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