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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모음 - Readingworks/소설·비소설·인문·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우리들의 청춘예찬

by Richboy 2009. 2. 7.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우리들의 청춘예찬

 

  옛날 강원도 산골에 너와집 짓고 사는 사람들에게 새우젓장수와 봇짐장수는 가장 기다리는 사람중 한 명이었다. 지난 번 왔던 이후로 세상이 어떻게 되었고, 변했는 지 이모저모를 전해주는 유일한 소식통이었기 때문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등짐을 풀고 시원한 냉수 한사발을 들이킨 후 굵은 팔뚝으로 훔치고 풀어놓는 세상이야기. 그가 직접 봤는지, 들었는 지 알 수 없다. 세치 혀에서 쏟아지는 사건, 사고는 순거짓뿌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를 학수고대했던 산골사람들에게는 넋놓고 침흘리며 듣기에는 충분한 신선한 얘기들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이유는 듣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필요한 때문인지 모른다. 그 시절 산골 사람들을 사람답게 만들어 준 이야기꾼은 팔도를 떠돌며 물건파는 장사꾼들이었다.

 

  지겨운 밥벌이에 하루를 보내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오늘날의 도시민들. 그들도 '소식'을 기다린다. 퇴근하기 바쁘게 TV를 켜고, 누군가가 떠드는 말과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듣기 좋던 싫던 새로운 이야기꺼리에 경청하고, 내 속에 접수하면 함께 나눌 사람을 찾아 휴대폰을 연다. 온전히 제 이야기만 해도 시원찮거늘 잠시동안 빌어온 남의 이야기를 놓고 흉을 보다가 제 속내를 함께 실어 보낸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도 "뭐하고 지내?" 물을까 겁이 나서, 한달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내 생활을 먼저 이야기하기가 뻘중해서가 아닐까?

 

그럴 대상이 있다면 그나마 낫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절묘하게도 그럴 상대가 없다면 심심하고 헛헛해진다. 우리가 사람이 그립다고 느껴질 때는 어쩌면 공감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는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서다. 언제 어느 때이건 책을 펼치면 눈으로 듣고, 생각으로 대답할 수 있어서다. 그 중에서 이야기책이라고 하면 단연 소설이 으뜸이고, 소설을 쓰는 소설가들은 가장 훌륭한 이야기꾼들이다. 옛날엔 등짐장수에게서 이야기를 구했고, 오늘날은 소설가가 소설을 통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여기 타고 난 이야기꾼이 한 사람이 있다. 자의든 타의든 전 세계(아무나 갈 수 없는 북녘 땅을 포함해서)를 떠돌며 이야기를 줍고 만들어 왔던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모티브로 젊은이들에게 근질근질한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이렇듯 장황하게 글을 늘어놓은 이유는 황석영이라는 이야기꾼의 소중함을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 <개밥바리가 별>을 읽었다.

 

 

 

 

  소설<개밥바라기별>은 시작부터 화제를 몰고 왔다. 문제(?)작가로 알려진 중견의 소설가가 신문에 연재를 해야 걸맞을 법 한데 인터넷에 자신의 소설을 연재했다. 다 읽고, 스크랩하면 책이 안팔릴텐데, 인세는 어쩌실려고? 젊은이들이 호응이나 있겠어? 하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모든 것을 불식시키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폭발적인 조회수를 연일 기록하며 연일 화제를 낳았다. 이 소설만큼은 그에게도 블룩(blook=blog +book)이 된 셈인데, 블로그에 연재되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책으로 발간된다면 독자들의 반응이 시들할 것 같은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데, 자신이 애정을 갖게 된 것들을 직접 소유하고 이를 다시 만끽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개밥바라기별>를 애독했던 블로거들은 책으로도 그를 만나려했다. 그 결과 여러 매체와 단체의 2008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소설은 작가 황석영이 유준의 몸을 빌어 이야기한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사춘기부터 스물 한 살 무렵 월남전을 참가하기까지의 방황을 담았다. 여기서 최근 한국 문단에 불고 있는 성장소설의 경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세와 권력에 맞서 대항했던 식자들의 고민이 이제는 '나'에게 집중되고 있다. 이것은 국가발전, GNP 향상 속에서 개인의 행복은 무시되어 왔던 과거와는 달리 개인의 행복과 발전이 곧 사회와 국가로 발전하는 서양의 개인주의를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 역시 [작가의 말]에서 외국과 비교해 턱없이 부족한 우리의 성장소설에 대해 '아마도 이는 개인의 내면적 성장이나 변화등을 다루기에는 근대화 기간 동안 현실이 그만큼 급박했다는 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사회 속에서의 개인 그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보다 주요한 원인일 것'이라고 말했다.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이 먼저가 아니라 모두가 '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보다 나은 사회로 발전함을 모두가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나'라는 일인칭으로 말하고 있다. 성격과 능력, 개성 모두 서로 다른 이들은 친구가 되어 서로를 지켜보고, 살피며 나를 키워가고 있었다. '나 스스로 소중함'을 주인공들을 통해 배우게 된다. 한 시도 떨어질 수 없을 것 같던 친구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저자는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라며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때려치운다고 해서 너를 비난하는 어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다.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선택해서 걸어가는 '나'는 오롯이 '나'를 위해 사는 것이기에 '나의 행복'을 찾아야 함을 배운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되돌아 올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청춘'이 아름다운 이유는 실패할 지언정 도전하는 용기있는 행동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저자 역시 자신의 지난 청춘이야기를 빌어 젊은이들에게 '스스로 작정해 둔 귀한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면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격려했다. 누구보다 거침없이 살아온 작가의 삶이어서 그의 조언에 신뢰감이 뭍어났다.

 

  "책을 쓴다는 것은 좋은 일 이지만, 제 팔자를 남에게 다 내주는 일이란다."고 말씀하신 엄마의 충고에도 그가 소설가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소설 속에 뭍어 있는 주인공들의 심리묘사와 오감으로 느끼는 듯 하게 하는 배경묘사들이었다. "어디에서나 기억은 거기 있는 사람과 함께 남는다"던가? 소설 속에는 어린 날의 황석영이 서 있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추억했던 적 언제던가 기억조차 없던 필자의 청춘을 수도 없이 불렀다. 그 시절의 막연함의 답도 무엇이었던가를 알게 했다. 순탄치 만은 않았던 청춘이 무조건적 반항이 아니라 목표를 찾지 못했던 순수한 방황이었음을 이제야 이해하게 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은 필자의 청춘도 실은 '개밥바라기별'이 떠 있었다는 것을 알겠다. 오늘 하루를 살아감은 그 시절 방황에 대한 대답이었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청춘예찬, 이 책을 두고 하는 말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