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낚인 책. 이 책에 '아이팟'은 없다!
유난히 여색女色을 밝히던 대학 동기 주진이가 자취생 대여섯 명을 제 방으로 불러모은 이유는 ‘찐한 비디오’를 세운상가에서 입수했기 때문 이었다. ‘누나의 행위’ 라는 제목은 한 겨울 야심한 밤에 하릴없어 등이나 긁고 있던 복학생들을 한데 그러모으기에 충분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졸지에 호스트이자 야한 비디오의 공급책이 된 녀석은 한 명당 얼마씩 관람비를 받아 맥주와 주전부리를 깔아 두었다. 기기묘묘한 소음을 내는 VTR에 플레이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녹색 불이 들어오고, 벌개진 열 두 개의 눈들이 브라운관이라는 먹지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FBI WARNING'이라는 대문자 경고문과 함께 한참을 읽어야 해석될만한 영문이 페이지를 가득 채우더니 서서히 페이드 아웃 되더니 요란한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I will follow him~Follow him wherever he may go~" 주인공은 수녀복을 입은 코미디언 ‘우피 골드버그’였고 영화의 원제목은 ‘Sister Act'였다.
외서外書를 번역한 책들을 살피다 보면 가끔 ‘누나의 행위’ 사건이 떠오른다. 엄연히 책의 내용에 걸맞는 훌륭한 제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의 재량으로 제 멋대로 제목을 붙여놓은 사례들을 발견하면 그들이 무슨 생각에서 이런 ‘무모한 짓‘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어진다.
켄 블랜차드의 책처럼 제목을 바꿔 성공한 케이스도 없잖아 있긴 하다. Whale done 이라는 원제목의 책이 처음에는 "YOU Excellent!:칭찬의 힘"으로 제목을 바꿨을 때 2만 부를 팔았는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제목으로 바꾸어서 20만 부 이상을 팔았던 사례는 지금도 출판계의 전설로 알려져 있다. ’칭찬의 힘이 아니라 제목이 힘’인 셈이다.
반면 단순히 독자들의 시선을 낚기 위해 책 제목과 내용이 전혀 맞지 않은 실망스러운 책들이 너무나 많다. 책 <아이팟의 백스테이지를 엿보다>(시그마북스)은 내가 최근에 제목에 낚인 책 중 하나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From concept to Consumer 풀어보자면 ‘컨셉에서 소비자까지‘이다.
책 자체로 보면 특별하고 괜찮은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제품개발의 아이디어부터 제품이 소비자의 손에 넘겨지기까지의 과정을 자신의 지난 경험을 토대로 구술함으로써 제품개발자들에게 시행착오를 줄이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아이팟의 백스테이지는 고사하고 ‘아이팟’이라는 단어도 몇 번 언급되지 않는다. 올 해 연말 국내에 강타한 ‘아이폰 열풍’에 대한 이해와 애플의 미래를 살펴보고자 했던 나같은 독자는 ‘책제목’에 제대로 낚인 셈이다.
처음 몇 장을 넘기면서는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서두가 꽤 길다’고 느꼈다. 애플과 아이팟이 언제쯤 나올까 묵묵히 지켜보며 페이지를 계속 넘겼고, 중반에 이르러 ‘뭐가 잘못됐다’는 기분에 원문제목을 확인하고 낚인 것을 알았다.
“책을 몇 장 넘기다가 아니다 싶은 책을 만나거든 가차없이 덮어라.”고 일본의 다독가 다치바나 다카시가 조언을 했었건만, 그에 필적하는 내공도 갖추지 못했거니와 지금껏 읽었던 시간과 공력이 아까워 마지막 장까지 거의 스킵skip하듯 읽어나갔다. 책 속에서 아이팟을 찾은 내게는 아쉽고 어처구니없었지만, 제품개발자와 벤처기술자라면 일독할 만한 좋은 책이다.
끝까지 읽은 덕에 한 가지 건져낸 것이 있다면, ‘제품의 아이디어를 시장까지 이끌어가는데 유용한 10가지 규칙’(부록A) 정도가 될 것이다.
1. 단지 훌륭한 제품을 갖는 것만으로 성공을 보장받을 수는 없다. 만들어놓는다고 고객들이 찾아와주는 법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2. 강력한 관리자와 작고 집중적인 다기능 팀을 활용해 제품을 개발해야 하며, 그들에게 빠른 의사결정을 위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3. 발명 자체 만큼이나 개발 과정에 있어서도 창의적이어야 한다.
4. 완전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빠른 시장진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5. 잠재 고객들과 얘기해보고, 실제 어떻게 하는지 관찰하는 등 간결하고 상식적인 차원의 제품 테스트를 시행하는 것이 좋다.
6. 잘 할 수 있는 일들은 직접하되, 다른 사람이 잘 하는 일은 외주를 활용하라. 이미 구현되어 있는 것들을 다시 개발할 필요는 없다.
7. 경쟁자와 같이 생각하라. 첫 제품을 만드는 동안 후속 제품을 구상하라. 그리고 당신 제품에 대한 최고의 경쟁 제품을 스스로 만들어 내라.
8. 당신이 활용하게 될 판매와 유통채널을 이해하고, 경쟁력 있는 판매 가격을 가능케 하는 생산 원가를 맞춰내야 한다.
9. 간접 판매 혹은 유통채널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지속하라. 제품이 얼마나 팔릴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부품이나 제품의 제고를 많이 가져가면 곤란하다. 과잉 재고보다는 부족 재고가 더 낫다.
10. 당신 스스로의 과대광고를 맹신하지 마라. 본문 210 쪽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한 위의 글만 보더라도 일종의 기술자(제품 개발자와 발명가)들을 위한 마케팅 입문서다. “운명이란 바로 그대들이 지닌 책, 책은 저마다 운명을 품고 있으니...”라는 오토 슈토에즐의 말이 있듯 책의 운명은 독자에 따라 변하는 법이다. 즉, 내가 보기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듯 보이는 책도 다른 독자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책이 될 수 있다. 한마디로 책의 가치는 독자의 소용에 따라 달려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당연한 말 같은 이 진리는 한 가지 중요한 뜻을 품고 있다. 바로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의 원서는 자국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을 법하다. 제품의 개발자의 입장에서 후배들에게 자신의 시행착오를 고백함으로써 계몽을 하는 책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발명가나 벤처의 CEO등 자칫 ‘내 제품이 세계 최고의 기술이다’며 제품이 만들어지기만 하면 날개돋힌 듯 팔릴 거라 생각하는 이른 바 ‘생산자의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이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조언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책은 일반 독자들이 흥미를 갖고 읽고 박수를 치기에는 무리가 있다. 더구나 이 책은 '프로토타입'(형태를 가진 시제품)‘의 제품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혹 아이팟이나 아이폰 등에 연동되는 애플리케이션,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제품과 서비스를 을 제작하는 개발자가 이 책에 관심을 둔다고 해도 처음부터 '핀트가 나간'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또한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제품들도 사례로 들고 있어서 작금의 마케팅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도 적절하지 않다. 아이팟의 백스테이지를 엿보다’라는 제목을 살펴보건대 이 책을 국내로 들여온 출판사는 다중을 상대로 이 책을 읽히기를 바란 것 같다. 그렇다고 보면 이 책은 독자대상의 컨셉부터가 잘못된 케이스다. 잘 살피지 않고 무턱대고 책장을 넘긴 내게 가장 큰 잘못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책의 제목에는 불편함을 지울 수가 없다. “책을 고를 때 제목에 낚이지 말라”. 이 책을 통해 새삼 배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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