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웃기지만 정말이야. 하지만 언제였냐는 기억이 또렷하지. 거리엔 반딧불이 같은 불빛들이 그득하고, 귀에는 캐럴이 끊임없어 들렸거든. 난 명동성당으로 들어서는 을지로 사거리 오른편 가로등에 서 있었어. 한 손에는 '사랑과 영혼'을 볼 수 있는 중앙극장 영화표 두 장, 다른 한 손에는 반쯤 탄 담배가 들려 있었지. 난 30~40분 정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추웠던지, 똥줄이 탔던지 담배를 꽤 피웠던 기억이 생생해.
끝내 그녀는 오지 않았어. 아무래도 내가 일방적인 데이트 제안을 하고 기다렸던 게지. 영화가 시작한 후 10분 정도를 그 자리에서 더 기다렸던 것 같아.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영화표를 잘게 찢었지. 그리고 내 머리 위로 뿌렸어. 나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내가 그런 이상한 짓을 하는 줄 몰랐을 거야. 그 날은 찢어진 영화표보다 훨씬 더 크고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거든."
필자의 스무 살 크리스마스이브 이야기다. 누구였을까 그녀는. 어렴풋한 기억 때문에 이 책에 더욱 애착이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이 소설 역시 필자의 이야기처럼 어느 겨울의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못 생긴' 그녀와의 연애 이야기
소설 속의 '나'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불쌍한 아내의 아들이다. 젊은 톱 탤런트에게 새장가를 간 중년의 배우 아버지. '나'에게 아버지는 그저 아름다움을 쫓는 나방이었다.
백화점에서 같이 근무하는 '끔찍하게 못 생긴' 그녀가 눈에 들어온 것도 어쩌면 새장가를 간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버려진 어머니에 대한 연정일 것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녀를, '나'는 마구 좋아하기 시작한다.
보통 우리의 현실에서는 끔찍하게 못 생긴 그, 그녀와의 연애에 설명이 좀 필요하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 연애를 당연하게 만들어주는 장치가 없다면 '나'와 못 생긴 그녀와의 사랑 이야기는 한없이 싱거울 뿐이다. 세 번째 주인공인 '독설가' 요한은 자칫 별 공감없이 흐를 뻔 했던 이 연애를 구원하고 현실감을 불어 넣는다.
"쿵 했는데 고급세단이나 외제차였다! 그럼 니가 행할 행동을 일러줄테니 반드시 입력해 둬. 우선 말없이 완장과 모자를 던져버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사무실로 뛰는 거야. 주임이 있으면 기절이라도 시키고 책상 오른 쪽 두 번째 서랍을 열어 신상명세서를 찾는 거야. 그걸 찢어 삼키든지 태우든지 하고 곧장 집으로 도망쳐. 그리고 다른 일자리 알아보는 거야. 알았지?"
요한은 '나'에게 백화점 주차 알바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며 등장한다. 요한은 "아니, 아니에요"를 연발하는 못난이 그녀를 '아니에너스'라 이름 짓고, 그녀를 닮아가는 주인공 '나'는 '아니우스'라 부르며 바보 같은 두 사람을 맺어준다.
남의 고민에 발 벗고 해결해주는 사람, 남을 즐겁게 해주어 함께 웃으려 하는 사람. 그러나 요한은 실은 절대고독의 개미지옥에 빠져 있는 외로운 사람이다.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의 헛헛함을 알았던 것일까, 진절머리 칠 만큼 버려진 사랑을 너무 일찍 안 탓일까. 하나였던 세 사람이 둘이 되자 그는 결국 손을 그어, 제 운명을 재촉하는 바보가 된다.
박민규식 '여자들을 위한 소설'
못생긴 그녀가 본 한국이란 나라는 화장을 하지 않고선 외출하기가 두려운 사회다. 남자와 여자가 철저하게 구분되는 야만적 사회이면서, 추함은 죄가 되고, 못생겨서 받는 차별은 추함의 대가로 달게 받아야 하는 당연한 벌로 인정하는 사회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못생기고 추한 사람은 그 반대의 부류를 위해 존재하는 배경이 되고, 잘생긴 사람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엑스트라가 된다.
이러한 구도는 소설 표지로 쓰인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에도 잘 나타난다. 시선은 그림 중앙의 아름다운 왕녀에게 집중되어 있고 그림 속 못생긴 시녀들은 왕녀를 돋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박민규를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늘 스펙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경쟁력 없이 살 수밖에 없는 대다수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남자들을 위한 소설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여자들을 위한 소설이라는 설명이다.
어쩌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못생긴 사람들이다. 남들과 비교해서 위에 있는 것이 확실할 때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안타까운 사람들이다.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예쁘고 잘 생겨야 행복해진다고 여기는 불쌍한 '추물'들이다. 행복은 자존감에 있다. 생김이 잘나고 못난 것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나'라는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박민규는 소설 속에서 독일로 떠난 그녀가 '못 생긴 여자'가 아닌 '한 명의 독신 동양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그녀를 통해 지금도 수술대에서 의사의 칼침을 기다리는 수많은 못 생긴 사람들이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기존의 소설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구성과 파격적인 문단 구성은 박민규답다. 작가가 20대를 보낸 199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소설 내용은 중년층이 공감하기에 제격이지만 풋풋한 스무 살 시절의 사랑에 세대구분은 무의미하다. 나의 스무 살, 그리고 첫사랑을 추억하고 싶어진다면 다시 읽어야 할 책은 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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