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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Some place../書架에 꽂힌 冊

어머니와 유자 아홉 개

by Richboy 2011. 4. 21.

 

  낼 모레있을 강의를 위해  자료를 정리하다가 다시 만난 한 편의 시. 2년 전이던가. 첫 책을 준비하던 여름은 어찌나 더웠던지. 서늘해지는 석양 무렵이 되어서야 글을 쓸 수 있었다. 

 

  오후 내내 하는 것 없이 빈둥대다가 손에 잡힌 고두현의 책 <옛시 읽는 CEO>를 펴보다가 이내 끝까지 읽었다. 책을 덮었을 때는 깊은 밤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시 한 편이 나를 울렸다.

  서울사는 자식(고두현)을 위해 음식을 마련해 보낸 어머니의 마음을 표현한 <늦게 온 소포>였다. 읽는 내내 닭똥같은 눈물이 뚜욱뚝 떨어졌다.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아련하고 고마워서. 

  

  그 시를 오늘 또 찾아낸 것이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신작 <곡선이 이긴다>를 낸 유영만 교수도 이 시 덕분에 '직선이 아닌 곡선의 미학'을 알게 되었고,  책까지 냈다고 말했다(고두현 시인과 공저를 했다. 일독할만한 좋은 책이다).

 

  헤아려 안다고 한들 그 깊은 속내를 얼마나 알 것인가. 그 고마움과 미안함을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당신이 없고 난 후는 꿈에라도 생각하기 어렵다. 부재로 인상 공허감을 채울 길이 없어서다. '있을 때 잘 해야지'하면서도 어찌해야 잘할까 싶다.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수화기 너머 나오는 당신의 음성을 머리에 담았다. 한겨울 유자 아홉 개 만큼 크고 소중한 마을을 차곡차곡 담았다.

 

-Richboy

 

 

 

 

'奇家書'(기가서) 이안눌

 

欲作家書說苦辛 욕작가서설고신

 

恐敎愁殺白頭親 공교수살백두친

 

陰山積雪深千丈 음산적설심천장

 

却報今冬暖似春 각보금동난사춘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다

흰머리 어버이 근심할까 두려워

북녘 산에 쌓인 눈이 천 길인데도

올 겨울은 봄날처럼 따뜻하다 적었네

 

 

 

 

 

가슴을 데워야 사람을 얻는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그때 일이 떠오른다. 이안눌의 <따뜻한 편지>와는 거꾸로, 어느 날 밤늦게 도착한 어머니의 편지와 소포에 관한 이야기다. 벌써 20년이 지났다. 그날 밤 우여곡절 끝에 늦은 소포를 받고 한참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글씨로 봐서 어머니가 보내셨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사전에 전화도 없이 불쑥 소포 꾸러미가 도착하다니... 노인네가 애들처럼 놀라게 해주려고 이러셨나?

 

 

  겉포장을 뜯는 데만 한참 걸렸다. 우체국에서 흔히 쓰는 포장지에 중후장대한 고어체 글씨로 노끈 묶은 부분을 절묘하게 피해가며 주소를 그려넣은(?) 품새가 영락없는 할마시 솜씨였다.

 

  꽃게 등짝 같은 마분지를 벗겨내니 닳고 닳은 내의가 드러났다. 그걸 벗겼더니 또 낡은 버선이며 장갑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 그렇게 몇 차례 포장을 벗겨내고 보니 아, 그 안에서 쏘옥 알몸을 드러내는 녀석들이란...

  혹시라도 으깨지거나 상할까봐 단술단지 싸듯 아듬고 보듬어서 보낸 남해산 유자 아홉 개였다.

  그런데 왜 하필 유자란 말인가. 별스럽지도 않은 과실 몇 개 보내면서 그토록 금이야 옥이야 싸서 보내는 마음이 따로 있긴 하다.

 

  내 고향 경상남도 남해에서 가장 정감 있는 것을 들라면 두말하지 않고 유자를 꼽는다. 알다시피 남해는 섬이다. 농사도 변변치 않고 무슨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섬사람들은 나름대로 호구책을 따로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는 것도 배가 있어야 하니 대부분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렵다. 하다못해 갯벌에서 조개를 줍거나 미역을 따서 한푼이라도 돈을 모양 아이들 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 지금이야 규모 있는 어장도 생기고 양식장이니 양어장이니 좀 나아졌지만 이전에는 참으로 곤궁했다.

  유자가 남해의 특산품으로 유명해진 것도 이런 궁핍한 환경 때문이다. 워낙 배고픈 지경에서 그나마 도드라져 보이는 ‘돈 나무’였기에 사람들의 심중에 특별한 의미로 새겨졌을 것이다. 물론 자연환경이나 기후, 토양 등도 작용했다. 차갑고 억센 바닷바람은 유자를 더 단련시킨다.

 

 

  유자는 남부 해안지방에서만 자란다. 그중에서도 남해 유자는 유독 성장이 느려 묘목을 심어놓고도 오랫동안 기다려야 과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향기가 진하다.

  집 뒤안이나 담장 너머에서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유자는 남해의 가을 풍경을 상징하는 진경이다. 요즘엔 남해 마을과 남해 멸치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유자보다 마을과 멸치가 실생활에 더 가까운 탓이겠지만 나는 그런 것들보다 유자에 더욱 특별한 정감을 느꼈다. 항기나 유명세 같은 것보다 그 성장과정이 남다르고 의미또한 각별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유자나무 몇 그루만 있어도 아이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해서 ‘대학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그 대학 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오랜 객지 생활에서 병만 얻은 아버지가 식구들을 이끌고 쓸쓸하게 귀향했던 터라 집안 형편은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돌아가셨다.

  내가 객지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혼자 남은 어머니가 겪었을 마음고생은 철이 든 뒤에도 다 헤아리지 못할 만큼 컸으리라.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른 환경에서 어렵게 키운 아들에게 늘 죄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어느 해 아버지 제삿날 속내를 한 번 보이신 적이 있다. 그런 어머니에게 늠름한 유자나무, 대학나무의 위용이 얼마나 부러운 것이었을까.

  게다가 소포 꾸러미 속에서 뒤늦게 발견한 편지 한 통이 나를 더욱 뭉클하게 했다. 어머니의 맞춤법은 자유자재였다. 그러나 그 속에는 어중간한 글쟁이보다 더 선명하고 사려 깊은 표현이 담겨 있었다. 말하자면 주제가 또렷한 글이었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서울에서 그래 고생 많지. 우짜겠노 성심껏 살면 된다.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많다. 그러니 어렵더라도 참고 꼭 건강해야 한다. 몸이 힘이다.....’ 이런 내용인데 이건 꼭 틀린 맞춤법 그대로 읽어야 어감이 온전하게 전해져온다.

 

 

‘큰 집 뒤따메 올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는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훈장집 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그나마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셨다. 한문도 조금 깨치셨고 어른들이 다 저 세상으로 가신 뒤, 열세 살 때는 직접 제문을 짓기도 하셨다. 그렇지만 자고 나면 바뀌는 맞춤법을 제때 따라잡지 못해 편지를 쓰거나 누구네 생일날을 기록할 때는 맞춤법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걸 보고 내가 빙긋거리면 ‘반편이글’이라도 모르는 것보다는 백 번 낫다고 퉁을 주곤 했다.

 

모든 게 서투른 사회 초년병 시절, 서울살이의 곤궁한 밭이랑 사이에서 아등바등하던 20년 전 그때, 어머니가 보내주신 유자 아홉 개와 중세국어 문법으로 써내려간 편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자식이 행여 힘겨워할까봐, 그 속내까지 미리 다 알고 배려하는 부모의 마음, 그것은 세상 무엇보다 더 위대한 ‘생각의 깊이’와 ‘배려의 폭’을 다 감싸 안는 사랑의 상징이자, ‘눈이 천 길이나 쌓인’ 세상에서도 ‘봄날처럼 따뜻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삶의 온기였다.

 

 

  그날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온 어머님 겨울 안부’를 보듬고 나는 풀어 놓았던 몇 겹의 종이와 내의들을 다시 접었다 펼쳤다 하면서 밤새 잠들지 못했다. 무연히 콧등이 시큰거려 창밖을 내다보니 새벽 눈발이 하얗게 흩날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아직도 내 곁에 현재형으로 살아 계신다. 유자껍질처럼 우둘투둘하지만 한없이 따뜻한 그 손으로 등을 다독거리며, 글 쓸 때나 말할 때나 남 생각부터 먼저하라고.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하면서 향기롭고 오래 남는 글을 쓰라고.

<옛시 읽는 CEO>(21세기북스) 중에서...

 

 

 

 

 

 

 

 

늦게 온 소포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도 하나씩 벗어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저자 소개 - 고두현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 시인. 1988년 입사 후 주로 문화부에서 문학, 출판 분야를 담당했다. 한경닷컴에 '고두현의 그래 이 책이야!' 칼럼을 연재했고, 1993년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가 있으며, 저서로는 『독서가 행복한 회사』가 있다. 제10회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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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시 읽는 CEO

저자
고두현 지음
출판사
21세기북스 | 2008-09-15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옛 시에서 발견하는 생각의 지혜! 창조적 영감의 힌트! 『옛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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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이 이긴다

저자
유영만 지음
출판사
리더스북 | 2011-03-28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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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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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들의 대한민국에 던지는 새로운 생존 패러다임『곡선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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