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티븐 갤러웨이
그가 다시 한번 선사하는 실화 그 이상의 감동
『상승』은 현재 캐나다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작가 스티븐 갤러웨이의 소설로, 국내에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이후 두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셜보 우르셔리’라는 집시 줄타기 곡예사의 이야기다. 중력을 거스르는 고공줄타기라는 색다른 소재를 바탕으로 지상의 비정한 문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한 인간의 경이로운 일대기가 펼쳐지는 『상승』은 출간 당시 내셔널 포스트에서 그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15개국 이상에 번역 출간되었고 저명한 캐나다 작가 이실 데이비드 윌슨의 이름을 딴 이실 윌슨 소설상 후보에 올랐다.
스티븐 갤러웨이의 저력은 실화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스토리텔링에 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포화의 위협 속에서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연주한 첼리스트의 실화를 다루어 전세계를 울린 『사라예보의 첼리스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실제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 치밀하게 써내려간 그의 작품은 실화 그 이상의 감동을 선사한다. 『상승』 역시 실존했던 두 인물에게서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 서커스의 흥망을 함께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최고의 줄광대 칼 월렌다, 1974년 쌍둥이 빌딩 사이에서 곡예를 벌인 프랑스 공중곡예사 필리프 프티가 그들로, 갤러웨이는 이들의 전기와 각종 기록을 참고해 화려한 서커스단과 줄타기 묘기, 곡예사의 심리를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한편 고공줄타기와 함께 이 소설을 더욱 특별하게 빛내주는 또하나의 소재가 ‘집시’다. 쾌활하고 낙천적이며 음악과 춤, 곡예에 능한 예술가적 기질을 가졌고 유랑생활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박해와 고난에 시달리는 집시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갤러웨이는 마찬가지로 집시에 대한 구전자료와 문헌을 깊이 조사해 그들의 역사와 풍습, 전설을 소설 속에 녹여냈고, 소설에 등장하는 환상적이고 재기 넘치는 집시 전설 열세 편 중 대부분이 실제로 구전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집시 전설들은 큰 줄기가 되는 장대한 서사와 조화를 이루며 소설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고, 이것이 스티븐 갤러웨이가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 이루어낸 문학적 성취로 평가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철저한 자료 조사로 만들어진 생생한 인물의 목소리와 묘사는 “그 어떤 책과도 견줄 수 없는 압도적인 오프닝”이라는 찬사를 받은 첫 장章을 탄생시켰다. 1976년, 까마득하게 높은 허공에 드리운 쇠줄 위를 걷는 남자, 바로 셜보 우르셔리가 뉴욕 쌍둥이 빌딩에서 생애 마지막 줄타기를 하는 장면이다. 줄 위에 선 곡예사의 시시각각 달라지는 내면과 평생을 건 줄타기에 임하는 결심, 숨죽여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물론, 한 줌의 바람, 쇠줄의 떨림까지도 놓치지 않는 묘사는 어마어마한 긴장감과 함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대체 어떤 생이 그를 까마득한 줄 위에 올라서게 했는가. 덧붙이자면, 9ㆍ11테러 이전에 이미 이 도입부는 완성된 상태였다. 갤러웨이는 쌍둥이 빌딩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걸 알지만 한때 세계 최고층 건물로 모든 줄타기 곡예사들의 꿈의 장소였다는 사실을 왜곡하고 싶지 않았으며 소설로써 역사를 기억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의 발치에는 언제나 비극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 운명을 딛고 날아오른 집시 줄타기 곡예사의 일대기
『상승』은 집시 줄타기 곡예사 셜보 우르셔리가 집시를 향한 증오를 피해 트란실바니아를 떠나 양차 세계대전의 풍랑 속에 갖은 고난을 겪고 미국 최고의 곡예사가 되기까지, 육십여 년에 걸친 장대한 일대기다.
강렬하고 인상적인 오프닝을 지나, 소설은 육십여 년 전 우르셔리 가족의 이야기로 거슬러올라간다. 때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트란실바니아의 시골 마을에서 집시인 우르셔리 가족은 헝가리인, 루마니아인들 틈에 섞여 살아가고 있다. 전쟁과 가뭄으로 피폐해진 마을에는 집시에 대한 증오가 넘쳐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셜보의 아버지가 마을의 오래된 성당 첨탑에 십자가를 올려주었는데 그 십자가가 신부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극에 달한 분노와 증오로 마을 사람들은 셜보의 집에 불을 지르고, 불타죽은 부모님을 뒤로하고 어린 셜보는 혼자 그곳을 떠난다.
부다페스트의 이모 집에 머물던 셜보는 집시를 경멸하는 이모부에게서 도망쳐 거리를 떠돌다 우연히 줄타기를 배우게 되고, 형과 여동생과 재회해 함께 유럽을 떠돌며 곡예를 펼친다. 유랑극단으로 인기와 명성을 얻지만 이번엔 게슈타포의 위협에 놓인 그는 간신히 대서양 너머로 달아난다. 미국에서는 최고의 서커스단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묘기를 선보이며 곡예사로서 최고의 시간을 보내는 한편, 사랑하는 여자와 가정을 꾸린다. 이런 행복도 잠시, 최악의 불행이 닥치고, 견딜 수 없는 공포에 직면한 셜보는 결국 줄을 떠난다. 그러나 극복하지 못한 공포는 사라지지도 않는 법, 셜보는 마침내 공포를 직시하고 다시 걸음을 내딛는다.
셜보의 일대기는 죽음에 맞서는 인간 내면의 투쟁기로도 읽을 수 있다. 집시라는 민족적 정체성 때문에 늘 생명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그에게 불행과 비극은 이 세상의 중력과도 같다. 하지만 셜보는 줄 위에서 중력을 거스르며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듯,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다. 대대로 구전되는 집시 전설은 셜보의 투쟁에 힘을 보탠다. 집시들이 수난의 삶을 살면서도 존재 이유를 잊지 않기 위해 전설을 만들어낸 것처럼, 스티븐 갤러웨이는 굴곡진 고통의 삶과 아름다운 집시 전설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비극적 운명에 비치는 한 줄기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상승
나오키상 수상작가의 2011년판 『화차』
지옥이 입을 벌린다, 단숨에 읽히는 작품의 파워!
사쿠라바 가즈키는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고 있는 작가로, 『토막 난 시체의 밤』은 나오키상 수상 당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내 남자』에 가까운 분위기와 문체를 보여준다. 소비자금융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연상시키지만 훨씬 대중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흔이 넘은 번역가 요시노 사토루는 고학생 시절에 하숙했던 진보초의 고서점 ‘나미다테이’의 이층에서 수수께끼의 미인 시로이 사바쿠를 만난다. 빼어난 미모와 어딘가 현실감 없어 보이는 묘한 분위기를 가진 사바쿠! 그녀는 유명 연예인을 앞세워 소비자를 현혹하는 ‘대출 광고’에 넘어가 결국 다중 채무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사토루도 대학 강사와 번역가라는 그럴싸한 직함과 명품으로 치장했을 뿐 실상은 빚에 허덕이는 채무자. 그러다 사바쿠가 사토루에게 자신의 빚을 떠넘기려 하면서 비극의 막이 열린다.
● 성형수술, 연예인 대출 광고, 사채의 세계
‘토막 난 시체’는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진 일본 버블 경제의 파탄을 의미한다. 패전 이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을 자랑하다 이무렵 경기 침체로 허덕이기 시작하는데,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정확히 이 시점에 해당한다. 소비자금융 전성시대를 살아간 네 명의 등장인물, 그들의 리얼한 ‘현대적 욕망’과 최후를 치밀하고 독특한 구성으로 그려냈다.
“사토루 군. 본래, 돈이라는 것에는 폭력성이 있어.”
“폭력성? 돈에요? 그럴 리가요. 사람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돈 아닌가요?”
“아니, 그렇지 않아. 돈이란 말이지, 없으면 사람을 곤궁하게 만들고, 있으면 있는 대로 질투나 원망을 사게 만드는, 굉장히 성가신 물건이야.”
사토루와 그의 장인어른이 나누는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돈의 양면성, 특히 소비자금융의 어두운 이면을 꼬집고 있다. 여주인공 사바쿠는 유명 연예인을 앞세워 소비자들을 현혹하는 ‘대출 광고’에 넘어가 결국 다중채무자로 전략하고 마는데, 이는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유명 연예인의 대출 광고가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행복해지기 위해 사채에 손을 대다가 결국 인간 사회에서 말살된 성형 미인 사바쿠 같은 인물을 통해 현대 사회의 외롭고도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 단숨에 읽히는 사쿠라바 가즈키의 문장
이야기는 사건 당일 날의 밤이 묘사된 프롤로그에서 시작하여, 제1장에서 제6장까지는 사바쿠와 사토루, 각자의 시선에서 본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나온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사토루의 대학 동기인 사토코, 사바쿠의 엄마와 바람난 상대였던 헌책방 주인 사토가 화자로 등장한다. 에필로그에서는 사건 발생 10년 뒤인 2020년을 배경으로 사토루의 딸이 화자로 나와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여러 등장인물의 일상이나 사소한 나날의 변화가 이야기를 서서히 이끌어간다. 그렇게 서서히 전해지는 등장인물의 배경과 이야기의 골격이 독자를 끌어당긴다. 한번 빠지면 단숨에 읽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문체는 나오키상 수상작 『내 남자』에 가까운 편이지만, 등장인물을 냉정하게 다루는 방식은 어느 미스터리 소설에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구원받을 수 없는 남녀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더 이상 결말을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겁고 괴로운 느낌이 들지만, 읽는 것을 그만둘 수 없는 흡입력을 지녔다. 사쿠라바 가즈키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독자를 쉽게 빠져들게 만드는 도입부, 좀처럼 짐작할 수 없는 사건 전개도 이 작품의 특징이다.
● 빚에 쫓기는 자의 초상, 가장 탁월한 묘사
『토막난 시체의 밤』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은 사바쿠가 소비자금융에 이자를 갚지 못하게 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마치 지옥이 부스스 깨어나 입을 벌리려는 순간이랄까. 눈처럼 불어가는 빚, 그 가공할 위력에 휘말려 인간성을 상실하고 인간 사회에서 말살되는 과정은 탁월하다. 저자가 오로지 이 부분을 그려내기 위해 전 작품을 소모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한번 이자가 밀리기 시작하자, 소비자금융은 엉뚱하게도 사바쿠를 우수 고객처럼 대우한다. 더 많은 돈을 대출해주고, 한번 빚에 쫓기기 시작하자 사바쿠는 소비자금융의 검은 술수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자신을 어둠 속으로 내던지고 만다. 그리고 변제 불능과 파산, 인신매매에 이르는 길은 가파르기 그지없는 직벽의 형상이다. 이 지점을 읽어나가는 동안 어느 독자라도 돈의 악마성에 치를 떨기 마련이다.
토막 난 시체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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