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Some place../오늘의 책이 담긴 책상자

리치보이가 주목한 오늘의 책 - 생각의 모험(신기주)

by Richboy 2015. 8. 4.

 

 

 

인생의 모서리에서 만난 질문들
“생각은 어떻게 나를 만드는가?”


인터뷰은 사람에게서 진심과 진실과 진리를 얻어내기 위한 전투다. 인터뷰어는 진심과 진실과 진리를 얻기 위해 인터뷰이에게 묻고 또 묻는 존재다. 인터뷰 과정에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지혜를 만날 수도 있다. 지혜는 인간의 두뇌가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접속하고 생각을 병렬화할 때 찰나처럼 나타나는 깨달음이다. 질문과 답 사이에서 통찰이 스치듯 지나간다. 모두의 진실과 각자의 진리와 서로의 진심을 통합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인터뷰는 진실과 진리와 진심 그리고 지혜를 얻는 고도화된 대화의 행위다. 그야말로 ‘생각의 모험’이다.
수많은 인터뷰를 거듭하면서 인터뷰어는 인터뷰이에게 매번 빼놓지 않고 던지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인터뷰어가 지닌 필생의 질문이다. 대화는 결국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한 사람의 텍스트가 다른 사람의 텍스트와 만나서 새로운 컨텍스트를 형성하는 행위다. 거창하게 말하면 두 개의 세계가 만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히 인터뷰어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질문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인생의 모서리에서 만나게 되는 질문들이다. 그 질문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때 인터뷰이의 대답 역시 진심이 된다. 그도 답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 비슷한 필생의 의문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의 모험 : 인생의 모서리에서 만난 질문들』은 지난 2년 동안 월간 『인물과사상』과 『에스콰이어』에서 진행했던 16인과의 인터뷰를 묶었다. 강신주와 김혜남, 주진우와 고종석, 강준만과 한상진, 장하성과 정태인, 정관용과 왕상한, 표창원과 김호기, 천명관과 원신연, 배병우와 황두진이다. 철학과 의학과 언론과 저술과 정치와 경제와 방송과 사회와 소설과 영화와 사진과 건축을 넘나든다. 각각의 인터뷰이와 개별적으로 진행했던 인터뷰들을 묶어보니 인터뷰어의 물음은 결국 몇 가지 근원적인 질문으로 함축되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글이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영화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정신과 의사 김혜남은 파킨슨병으로 아파하면서도 타인의 불행을 가능한 한 더 많이 짊어지고 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기자 주진우는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산지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진실을 드러내는 사람은 왜 모두 불행해질까?” 저널리스트 고종석은 비록 절필했지만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고종석은 세상을 믿고 싶어하는 회의주의자다. 노학자 강준만과 한상진은 한국 진보 정치의 발전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경제학자 장하준과 정태인 역시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진리를 위해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그들의 학문적 용기는 실로 대단했다. 진정한 지식인의 길이었다.
방송 진행자로서 정관용과 왕상한은 진실에 접근하는 상반된 두 가지 태도를 보여주었다. 정관용이 객관과 중립을 금과옥조처럼 지켰다면, 왕상한은 때로는 주관과 개입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진실에 접근하는 이런 태도는 정관용 방송과 왕상한 방송의 색깔을 결정했다. 그렇게 방법은 달라도 그들의 목표는 같았다. 사람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프로파일러 표창원과 사회학자 김호기는 국정원 댓글 사건과 세월호 참사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이다. 표창원과 김호기는 개인으로서는 전부 이해하기 어려운 거대한 사건의 맥락 속에서 시민이 지녀야 하는 마땅한 양심적 태도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소설가 천명관과 영화감독 원신연은 꿈의 영역에 있는 존재들이다. 불우했던 두 사람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때 현실을 다 덮어버릴 수 있는 은막인 영화에 매혹되었다. 사진작가 배병우와 건축가 황두진은 그런 현실 세계를 다시 짓고 싶어 하는 예술가들이다. 배병우는 소나무에서 영적 아우라를 포착해냈다. 황두진은 현실 공간을 재해석하고 재건축하고 있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강신주는 강단철학에서 벗어나 동서양 철학을 종횡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문학자다. 강신주는 강연을 통해 대중들의 머릿속으로 가슴속에 ‘지뢰’를 매설한다. 그런데 그 지뢰는 5년 뒤에 터질 수 있고, 1년 뒤에 터질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삶을 자기 경험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개인의 내면에서 출발해서 사회가 변하고, 사회의 감시와 처벌로 상처 받은 개인이 치유 받고 감시와 처벌에서 자유로워지면 비로소 세상이 변한다. 강신주는 용감하게 사랑하라고 말한다. 사랑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감정이지만, 인간이 가장 절망하기도 쉽다고 말한다. ‘무조건 용감하게 사랑하라.’
정신과 의사 김혜남은 15년 넘게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그래도 ‘오늘을 재미있게’ 살고 있다. 김혜남이 절망에서 털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단지 미래가 좀 불확실하고 현재가 불편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불길에 뛰어들어도 김혜남은 김혜남이고 천국에 가도 김혜남은 김혜남이고 악당 소굴에 들어가도 김혜남은 김혜남이기 때문이다. 왜 오지도 않는 미래를 끌어당겨서 현재를 망쳐야 하는지 하는 생각을 하며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삶과 연애하라.’

글이란 무엇인가?

한국 사회에서는 기자가 사실을 사실대로 쓰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고 판사가 법대로 판단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한국 언론 자유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주진우는 오직 ‘사실’과 ‘진실’만을 이야기했지만, 권력의 칼날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죽은 권력과 살아 있는 권력과 조폭과 종교와 부정부패 등 남들이 하지 않는 취재 영역에서 홀로 열심히 돌을 던져왔다. 사실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갈지자로 가더라도 방향은 틀어놓을 수 있고, 그 흐름을 조금 바꿀 수는 있다. 희생과 노력이 세상을 밝게 한다는 믿음은 주진우 기자가 글을 쓰는 이유다.
저널리스트 고종석은 “더는 글을 쓸 소재가 없어지고 동어반복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절필했”다고 말한다. 고종석이 30년 넘게 글을 쓴 이유는 호구지책이자, ‘먹고사니즘’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인가? 글이 세상을 바꾸는 데 완전히 무력(無力)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힘은 아주 미약하다. 루소나 백과전서파의 글들이 프랑스혁명을 풀무질했고, 카를 마르크스의 글들이 러시아혁명을 풀무질한 것은 맞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글이 아니라 직접적인 정치다. 고종석은 자신은 논객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글들이 뾰족하거나 과격하거나 비장하기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강준만 교수가 ‘싸가지 없는 진보’ 논쟁을 촉발시켰다. 한국의 진보는 다수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게 아니라 이성과 논리만으로 당내 계파 투쟁에서 승리하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다. 문제는 이성과 논리만으로 계파 투쟁에서 이긴 세력은 바깥에서는 오히려 싸가지 없다고 외면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진보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감성에는 정말로 무지할 정도다. 싸가지는 일종의 ‘암묵지’다. 그런데 싸가지는 태도의 문제라서 설명하기도 어렵고 동의받기도 어렵다. 진보 언론도 ‘싸가지’ 문제를 쟁점화하지 않는다. 진보는 그렇게 이성에 중독되었다. 그러니 아무리 진보적인 정책이라고 해도 이것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고 결실을 맺게 해야 하는데, 그 부작용에 대한 미시적 대안이 없다. 진보는 선언적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진보적 정책은 나왔지만, 유권자들은 진보의 정책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진보는 총론만 있고, 각론이 없다.
한상진 교수는 줄기차게 야당을 비판해왔다. 야당이 제대로 하려면 반드시 양날개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와 여당과 싸울 때는 결연하게 싸워야 하지만, 유권자들이 그 싸움에 짜증을 내면 민생정치로 해결하라고 주문한다. 그러자면 융통성이 필요하고, 확실한 자기 비전과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의 실권파들은 반드시 선거에서 승리하기보다는 당 안에서 자신의 지위나 특권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굉장히 좁고 자기중심적이고 특권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폐쇄적이다. 반대로 민주당이 현재의 체제로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무망하다고 유권자들이 느낀다면 확실하게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당을 부수는 것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거니와 과감하게 시작할 수 있고, 새로운 실험을 통해 적어도 탈정치화로 인한 위험은 막을 수 있는,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장하성 교수는 ‘한국 자본주의’를 고쳐 쓰자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국 내에서는 그 반응이 차갑다. 한국의 자본주의를 논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했거나 외국 사례를 공부했다. 한국의 현실에 근거한 게 아니라 자신의 이념적 지평에 의거해서 주장한다는 말이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세계적 불평등을 이야기하는데, 왜 우리는 서구의 잘사는 나라의 불평등 문제에 열광해야 하는가? 자본주의적 성장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차피 잘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잘살게 되느냐는 일반 국민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국민의 절대다수의 중산층이나 서민들의 삶이 나아지느냐가 중요하다. 결국 국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데, 경제성장은 왜 하냐는 질문이 강하게 제기되어야 한다.
정태인 소장은 토마 피케티를 논한다는 것은 한국의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무척 불편한 일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소득 불균형과 경제 불평등이 가장 빠르게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류 경제학자들은 토마 피케티 논쟁을 무시하거나 묵살한다. 더구나 학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사회 바깥에서 건전한 논쟁을 일으키는 법이 없다. 그러나 토마 피케티는 방대하고 정교하게 300년의 통계를 바탕으로 일관된 기준에 근거해 자료를 산출해서 자기 주장을 입증했다. 주류 경제학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분배 불균형을 설명해낸 것이다. 정태인 소장은 부의 불평등을 완화시켜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성장률이 높아지는 것은 맞는데, 대파탄을 거쳐서 가느냐 부드럽게 합의하고 제도를 바꿔나가느냐에 따라 ‘불평등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말한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언론은 진영 논리로 편가르기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진영 논리가 강해지면 사실에 기반해서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언론의 기본 사명을 놓친다.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사실인 양 보도할 우려가 커지기 때문이다. 정관용은 언론의 기자 정신은 철저하게 사실에 근거해서 진실을 추구해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수많은 인터넷 언론이 생기다 보니 더 강하게 견해를 말해야만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언론 지형은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양분되어버렸다. 하지만 정관용은 사람들이 사실과 진실에 늘 목말라한다고 말한다.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에 대해서는 혐오하고, 건강한 시민의식이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합리성에 바탕을 둔 판단이 사회를 이끌어갈 거라고 믿는다.
왕상한 교수는 방송 권력으로 더불어 잘사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너는 틀렸고 나만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에서는 더불어 잘살 수가 없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상대방의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이해해야 한다. 왕상한 교수는 방송을 통해 그런 다양한 견해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이 왕상한 교수가 방송 권력을 사용하는 법이다. 그래서 치열한 소통을 통해 타협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왜 타협이 되지 않을까? 치열한 토론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승복을 못한다. 한국에서는 다르면 틀린 거고, 다르면 다 적인 거고, 왔다갔다하면 다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흑백논리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데올로기다.

사회란 무엇인가?

2012년 12월 11일 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이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에는 “수서 경찰서장이 오피스텔 문 앞에서 국정원 여직원에게 문 열어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모습의 사진이었다”라고 쓰여 있었다. 바로 경찰대학교 표창원 교수가 올린 사진이었다. 그 순간에 표창원 교수는 합리적인 의심이 발동했다. 그 상황에서 경찰이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국민의 신뢰를 잃는 일이었다. 트위터에 ‘경찰상 즉시강제’ 원리를 언급했다. 경찰이 즉시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는 법적 근거를 제공한 것이다. 표창원 교수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법과 절차를 준수하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대한 진실을 구축하는 거라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목격자나 내부 고발자가 나오면 도움이 되는 거고, 허위 자백이나 집단적 거짓말을 만나면 장애가 생기는 것이다. 2015년 7월 17일 대법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을 인정한 원심을 깨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사실상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면죄부를 준 꼴이다.
김호기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정당의 가장 큰 문제는 대표성의 위기라고 말한다. 정당은 국민들의 정치경제적 의사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한다. 이것은 야권이 더 두드러진다. 야당이 덜 제도화되어 있다 보니 유권자들의 가치와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014년 6·4 지방선거는 세월호 참사의 희생 위에서 치러졌지만, 야권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명백한 승리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정치적 영역을 넘어 사회 전체의 영역에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국가와 개인의 이중 혁신’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정부와 정당 등의 정치사회 밖에서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영향의 정치를 제대로 구사하기 위해서는 시민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행동의 출발점은 마음의 변화와 마음의 정치다.

영화란 무엇인가?

소설가 천명관은 소설의 서사가 굉장히 약해졌다고 말한다. 1990년대부터 전개된 쇄말주의 때문이다. 서사보다는 인간의 내면 묘사 같은 게 주류 문학이 되었는데, 등단 제도나 문학상 제도나 계간지의 편집 방향 같은 게 작동하면서 소설이 세상에서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더구나 한국은 순혈주의 문학에 집착한다고 비판한다. 천명관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억울함이다. 세상이 자신을 잊었다는 억울함에 파묻혀서 밤마다 좌절을 곱씹으면서 쓰는 게 글이다. 어쩌면 천명관은 세상에 대한 복수심으로 글을 쓰고 있다. 또한 자신이 쓰는 소설들은 모두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이야기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도 그렇고 『고래』도 그렇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동두천 기지촌 이야기는 15년 전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어서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것이다.
영화감독 원신연의 《구타유발자들》은 반문화적 영화의 대표격이다. 2004년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최우수작품상에 당선된 《구타유발자들》은 제도권 영화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때 한 심사위원은 “이게 그저 치기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정말 만들고 싶어서 쓰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원신연은 상업영화를 만들지만, 그 안에 작가의식이 없으면 그 영화는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연출 제안을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웹툰을 본 대중들의 기대감을 배반할 자신이 없어서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99퍼센트가 주류화된 사회다. 주류화된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들려면 주류화된 생각만 할 수밖에 없는데, 원신연 감독은 비주류적인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원신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사진작가 배병우는 소나무를 찍는다. 배병우 작가는 왜 소나무를 찍을까? 소나무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가치 같다고 말한다. 한중일 동양 3국은 세계대전을 겪고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 자신을 정말 많이 잃어버렸다. 배병우가 소나무 사진을 찍는 것은 자연 속에서 발견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작업이었다.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을 보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와 맥이 닿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겸재 정선의 그림 100장 가운데 99장에 소나무가 나온다. 그래서 겸재 정선의 그림과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은 일맥상통한다. 배병우는 사진이든 디자인이든 건축이든 발전하려면 다양성을 인정해주고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의 토양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해야 진정 창조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건축가 황두진은 동네 건축가다. 한국처럼 맨땅이 없는 나라에서 나고 자란 건축가는 무엇을 통찰해야 하는가? 자신의 동네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연구해서 그 동네의 개념을 넓히는 것이다. 동네의 골목에는 역사적 퇴적층이 쌓여 있다. 우리가 황무지에서 사는 게 아니라면 도시에는 늘 누적의 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황두진은 서울 서촌에 살면서 무지개떡 건축을 통해 도시 맥락을 바꿔놓고 있다. 황두진 건축가가 사는 일터이자 집터는 원래는 초등학교 터였고, 한때는 해군제독이 살았던 곳이라 제독집이라고 불렸다. 현재는 그 과거 위에 황두진 건축가가 살고 있는 것이다. 건축가는 큰 긍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건축가는 한국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의 틈새를 벌려서 그 안에 좋은 것을 집어넣으려는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모험

저자
신기주 지음
출판사
인물과사상사 | 2015-07-27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인생의 모서리에서 만난 질문들 “생각은 어떻게 나를 만드는가?”...
가격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