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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모음 - Readingworks/소설·비소설·인문·

히가시노 게이고틱한 일곱 개의 단편. 단, 한꺼번에 읽지 말라!

by Richboy 2009. 5. 5.

 

 

 

 

 

 

 

히가시노 게이고틱한 일곱 개의 단편. 단, 한꺼번에 읽지 말라!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못됐다. 뉴스나 신문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교통사고와 자연재해을 접하면 ‘저런 쯔쯧쯧~’하면서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유독 살인사건, 다시 말해 ‘사람이 죽은 사건’에 대해서는 ‘오~ 무슨 일이고?’ 하며 관심을 둔다. ‘왜 죽었을까?’에 흥미를 느낀다는 말이다. 남의 일같지 않아서 일까? 살인자적 측면일까, 피해자일까 알 수 없다. 이런 관심도 부족해서 사람들은 추리소설을 읽는다. 살인사건은 왜 일어났고, 범인은 누굴까? 끈질긴 추적 끝에 범인을 잡았다면 어떻게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무척이나 궁금해 한다.

 

  물론 ‘살인사건의 피해자와 그 유가족의 억울한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범인을 잡는 것은 응당 당연한 일이고, 가장 우선적인 해결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관심을 두는 것이겠지만, 독자가 모두 형사가 되고 싶을 리 만무한데 왜 그렇게 있지도 않은 소설을 쓰고, 읽으면서까지 살인사건에 집착해야겠냐는 말이다. 그런 이유는 이런 사건은 좀처럼 만나 보기 힘들고, 또한 죽은 사람을 놓고 벌이는 범인과 형사의 머리싸움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풀어야 할 해답’ 중에 가장 ‘스릴’이 있는 싸움이기 때문은 아닐까?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끔찍한 스릴’을 즐긴다니 그게 못됐다. 게다가 있지도 않은 사건을 만든 이야기를 즐기니 더 못됐다.

 

  요즘 내가 못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늦은 밤 조용히 홀로 앉아 잠을 잊고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재미에 빠져들고 있다. 읽고 나면 항상 ‘피해자의 억울함’과 ‘범인의 잔인함’에 씁쓸한 입맛을 다시면서도 전혀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실마리가 잡히고 서서히 풀려가는 매력에 사로잡혀 책을 놓질 못한다.원인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이 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나쁜 사람이다, 이 사람. 지난 토요일 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을 읽으며 밤을 새웠다. 원제목 犯人のいない殺人の夜 이다.

 

 

 

 

  살인사건은 일어났다. 하지만 범인이 없다? 말 그대로라면 자연사나 자살이 아닌가? 하지만 자연사도, 자살도 아니다. 과연 범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를 범인이라고 불러야 할까? 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 일곱 편을 한 권에 담았다.

 

  이 책은 일본에는 199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의 작품다운 트릭과 의외성이 숨어있는 단편 미스터리물이다. 지금껏 내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이 장편소설이고 ‘놀라운 지능의 범인’과 ‘ 더 놀라운 지능의 해결사(형사, 물리학 박사)’의 승부였다면, 이 소설은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다반사’의 사건과 ‘평범한 인물’들이 가해자라는 점이 특별했다. 그의 장편에서 느꼈던 길고 긴 숨과 최고 꼭지까지 고조되는 긴장감은 없지만, ‘평범한 사건 속에 숨은 의외성’은 장편의 그것보다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욱 짙은 여운을 남긴다. ‘소설에서 말이 되지 않는 사건에 대해 글을 쓴다면 ’개연성도 없고, 현실성없는 말도 안되는 소설‘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존재하는 곳이 현실이다’는 어느 소설가의 말이 생각나게 하는 소설들이 들어 있다. 길고 짧은 한 편 한 편의 스토리마다 임펙트가 강했다.

 

  <작은 고의故意에 관한 이야기>는 말그대로 ‘미필적고의에 의한 살인’을 말한 단편이다. 이는 ‘과실치사’ 즉 고의를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주의의무위반이나 발생한 결과에 대한 예견가능성과 회피가능성을 문제삼는 과실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고의성故意性을 지닌 우발적 살인을 이야기했다. 사춘기 시절에 겪는 연인의 버려짐, 즉 실연失戀의 가능성에 일어난 사건인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과적 사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어둠 속 두 사람> 역시 청춘시절 겪는 사랑으로 빚어진 사건을 담았다. 사랑과 욕정을 누가 함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욕망 앞에서 있는 인간은 누구나 나약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춤추는 아이>는 소년의 안타까운 사랑을 이야기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3미터 거리 만큼 떨어진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다. 짝사랑이 그것이다. 답을 알 수 없기에 한없이 순수하고, 뜨거울 수 있는 이 사랑은, 알려지는 순간 불쾌한 집착으로 보여지거나 혹은 오해를 사는 아픔을 낳는다. 내가 던졌던 짝사랑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내 마음을 알았을까? 그래서 그들도 인생이 변했을까? 과거를 돌아보게 했다. <끝없는 밤>은 형사라는 직업을 생각하게 했다. 용의자 선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범인일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 형사들은 자신이 찍은 용의자가 범인인 것을 알게 된다면 과연 기뻐하기에 앞서 왜 그래야 했을지를 알아야 하기에 범인의 입장에서 다시 추적해야 하는 직업이다. 그리고 끝내 죄는 미워하고 인간은 미하지 말아야 하는 숙제도 안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시각을 잃어 자신이 불행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항상 오감을 깃세워야 하는 그들의 직업에 경의를 표하게 했다.

 

  <하얀 흉기>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답지 않게 ‘호러물 같은 공포심’을 불렀다. 자식을 잃고 ‘싸이코’가 되어버린 여성을 보면서 가늠할 수 없는 모성애의 깊이와 넓이를 만나게 된다. 또한 상심의 원인을 찾아 복수하는 원초적인 인간성을 목격한다. 섬뜩한 소설이었다. <굿바이, 코치>는 무서운 살인사건 이야기다. 자신의 행복을 지키려 남에게 불행을 부르는 인간과 자신의 영원한 사랑은 자신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인간이 빚어낸 살인이었다.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사건의 정황을 비출 때 ‘일본인답다’는 느낌을 받지만 이처럼 잔인하도록 섬세한 사건을 만나면 ‘과연~’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한다.

 

  마지막 작품인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이 작품의 백미였다. 쇼프로에서 ‘조용필’은 맨 나중에 나와 대미를 장식하듯 이 작품 한 편을 읽는 것만으로도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반전에 반전, 마지막 대반전은 어의를 잃게 만들었다. 이 작품에는 코멘트는 불가하다. 느낌도 말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읽어야 한다. 서점을 찾아 서서라도 이 작품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이 ‘완전무결한 사건’을 만들기는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가장 크게 단죄해야 할 ‘살인’을 해놓고,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의 악심惡心은 과연 그들만의 소유물일까? 그리고 불완전하기에 그 자리에서 ‘범인’을 벌할 수 없는 형사는 어떤 심정으로 범인을 추적하고 대할까? 이것이 내가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찾는 ‘행간의 의미’다. 만약 우리가 제목처럼 ‘범인없는 살인 이야기’를 읽는다면, 아마도 그 책을 읽고 ‘범인 없는 추리소설이 말이 되는가?’ , ‘추리소설가는 직무태만을 한 것 아닌가?’ 외치며 재미없는 책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화성연쇄살인사건’처럼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뭍혀가는 수많은 사건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사건들은 ‘말이 되는 사건인가?’ 소설같지 않은 사건들이 현실에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범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범인이 잡히지 않는 한 스토리는 진행중이다.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으면 범인의 지능과 형사의 사건해결능력에 혀를 내두르며 ‘작가’의 필력에 얼만큼의 찬사를 던질지를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얼른 잊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다르다. 무려 일곱 건의 살인사건이 아니던가? 게다가 주위에서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한 것이어서 작가의 필력을 운운하기에 앞서 피해자와 살인자의 면면에 사로잡혀 미망을 떨치지 못하게 된다. 늦은 새벽에 한 권을 모두 읽고 침대에 홀로 누워 있는 기분이란... 겪어보지 않았다면 말을 말아라. 과거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성을 발견할 수 있는 책, 하지만 편한 밤을 보내려거든 하루에 한 편씩 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