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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보이가 주목한 오늘의 책 - 하이 파이낸셔: 지크문트 바르부르크의 삶과 시대

by Richboy 2011. 5. 26.

 

 

 

   현대에 와서 모습을 갖춘 ‘상업은행’의 틀을 만들어낸 장본인 금융인 지크문트 바르부르크(Siegmund Warburg)의 전기이다. 그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하이 파이낸스’라는 표현 자체를 동어반복으로 파악했으며,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La Haute Banque’를 주창했다. 1930년대 불어닥친 대공황의 여파로 선대의 은행이 초토화된 사건을 겪으면서도 그는 영국의 경제 회복과 서유럽의 통합, 그리고 궁극적으로 세계화의 탄생에 전념한 경제학자로 평가 받는다.

   이 책은 영국에서도 대중에게 공개된 적 없는 1만여 통 이상의 편지와 지크문트 본인이 쓴 일기를 토대로 써내려간 니얼 퍼거슨의 회심작으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각적인 시각을 보여주며 심리학자이자 정치인, 그리고 연극배우이면서 은행의 경영인으로 살았던 다면적이고 모순이 많은 인간 지크문트를 조명한다.

   독일의 은행가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나 영국 금융계의 거물이 되기까지의 과정, 두 번의 전쟁과 대공황이라는 재앙 속에서도 세계경제를 재건한 그의 직관과 혜안, 그리고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성격과 별난 기질 때문에 수도 없이 겪어야 했던 애증이 교차하는 그의 인간관계까지 고스란히 담음은 물론, 오늘날의 금융계에 넘쳐나는 단순한 투기 경향과는 완전히 유를 달리하는 지크문트의 철두철미한 사업 방식과 엄격한 윤리관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경제학의 거장, 니얼 퍼거슨이 소개하는
금융인 바르부르크의 전기

유럽 통합과 세계화의 기초를 다진, 20세기의 금융주치의
칸막이 없는 사무실, 소비자 위주의 민주주의를 선구한 경영혁신가

   -금융인 지크문트 바르부르크(Siegmund Warburg)는
지크문트의 금융관은 부채를 부채질하고 무분별한 투기를 권하는 우리 시대 금융철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이 파이낸스’라는 표현 자체를 동어반복으로 파악했으며,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La Haute Banque’를 주창했다.
1902년 출생~1982년. 현대에 와서 모습을 갖춘 ‘상업은행’의 틀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유대계 독일 은행가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탈출해 영국으로 건너와서 1946년 투자은행인 S.G.바르부르크사를 설립했다. 전후 런던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며 금융계의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이후 유럽의 금융 통합을 설계했다. 1930년대 불어닥친 대공황의 여파로 선대의 은행이 초토화된 사건을 겪으면서도 그는 과거의 교훈을 잊지 않고 영국의 경제 회복과 서유럽의 통합, 그리고 궁극적으로 세계화의 탄생에 전념했다.
또 미국의 월 스트리트에 쿤로브라는 투자회사를 두어 동업자로서 1953년부터 1964년까지 미국 경제에 관여했다.

-금융역사학자 니얼 퍼거슨

   

   현 런던은 월 스트리트와 함께 국제 금융의 중심이지만, 전쟁이 끝난 1945년에는 어느 모로 보나 금융의 중심으로서는 완전히 끝장난 상태였다. 그러나 영국은 부활했다. 독일의 공습 이후 영원히 잿더미로 소멸할 것 같던 영국은 불사조처럼 되살아났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잿더미에서 런던이 부활하는 데 그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던 한 사람의 전기다.

 


    하이 파이낸셔 는 영국에서도 대중에게 공개된 적 없는 1만여 통 이상의 편지와 지크문트 본인이 쓴 일기를 토대로 써내려간 니얼 퍼거슨의 회심작이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각적인 시각으로 다룬 작품이다.
   자신이 좋아했던 토마스 만의 소설 주인공처럼 지크문트는 심리학자이자 정치인, 그리고 연극배우이면서 은행의 경영인으로 살았던 다면적이고 모순이 많은 인간이었다. 하이 파이낸셔 에서는 독일의 은행가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나 영국 금융계의 거물이 되기까지의 과정, 두 번의 전쟁과 대공황이라는 재앙 속에서도 세계경제를 재건한 그의 직관과 혜안, 그리고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성격과 별난 기질 때문에 수도 없이 겪어야 했던 애증이 교차하는 그의 인간관계까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크문트 바르부르크의 삶과 철학은 당시만큼이나 쉴 새 없이 변화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이정표를 제공할 것이다.
퍼거슨은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금융계에 넘쳐나는 단순한 투기 경향과는 완전히 유를 달리하는 지크문트의 철두철미한 사업 방식과 엄격한 윤리관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니얼 퍼거슨 Niall Ferguson 세계사적 전환의 시점에서 최근 경제 위기를 예측하면서 국내외 언론에서 활발한 조명을 받았다. 폴 크루그먼과 조지 프리드먼의 최대 경쟁자로 꼽힌다. ‘차이메리카Chimerica’라는 용어로 중국과 미국의 공생관계를 설명해냈으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관한 수정주의 시각으로 유명하다. 그는 1964년 글래스고에서 태어나 1985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현재 하버드대학 역사학 교수이자 비즈니스스쿨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옥스퍼드대학 지저스 칼리지와 스탠퍼드대학의 후버 칼리지 선임 연구교수도 겸하고 있다. 타임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올랐다. 1987년 저널리스트인 수잔 더글라스와 결혼했다.

영국 BBC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Ascent Of Money'의 진행을 맡으면서 2007년부터 시작된 금융 위기의 실체와 주식시장의 폭락 원인을 파헤쳐 큰 반향을 일으켰다(한국에서는 KBS 2TV에서 '돈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제국』, 『현금의 지배』, 『종이와 쇠』, 『실제의 역사』, 『전쟁의 연민』, 『콜로서스』, 『금융의 지배』 등이 있다.
 


-지크문트 바르부르크가 제안하는 리더십 네 가지

 


1. 보통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가능한 한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은 리더십의 전제 조건 중 하나다.
2. 좋은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팀의 우두머리가 비판적인 생각을 하는 순간이 거의 없어야 하며, 팀원들이 옳을 때만이 아니라 틀릴지도 모르는 순간에도 그들을 지지해주어야 한다.
3. 경영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면 앞장서서 이끄는 사람은 거의 없다.
4. 좋은 보스가 되는 데 가장 어려운 일은 딱 맞는 후계자를 찾는 일이다.

1. 지크문트와 사촌들

지크문트 바르부르크는 유대계 독일 은행 가문인 바르부르크가 출신이다. 아버지 게오르게스가 가문 내부의 경쟁에서 밀려난 탓에 함부르크가 아닌 독일 남부의 한적한 도시 튀빙엔에서 1902년 출생했다. 즉 함부르크 출신의 배타적 친척들과는 태생부터가 다른 아웃사이더인 셈이다. 지크문트는 가문의 중심에서 활약하던 사촌들과는 달리 고즈넉한 독일 남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때 현명하고 섬세한 어머니 루시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 덕분에 금욕과 완벽에 대한 추구, 자기비판과 겸손함을 몸에 익혔다.

2. 첫 번째 세계 혁명
러시아혁명의 여파가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당시 10대였던 지크문트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이후 인플레이션으로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지크문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삼촌 막스의 제안에 따라 삼촌이 운영하는 함부르크의 은행 막스 M. 바르부르크사에 합류하게 된다. 이곳에서 20대 중반까지 견습 은행원으로 일하다, 1926년 스웨덴 출신의 에바 마리아 필립슨과 결혼한다. 에바는 현명한 아내로 지크문트에게 많은 사랑을 쏟았을 뿐 아니라, 그가 늘 정서적 안정과 냉철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두 사람은 함께 미국으로 가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곳? 정착한 바르부르크가 사람들에게 실망한 채 1928년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돌아온다.

3. 공화국의 쇠락
1928년 지크문트 부부는 독일로 돌아왔지만, 당시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으로 계층 간의 갈등이 극심했다. 영국과 미국의 경제를 경험한 지크문트는 막스 M. 바르부르크사 내에서 입지를 키워가면서도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회사 안에서 독재적 권력을 휘두르던 삼촌 막스에게 도전할 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국 대공황의 영향이 독일에까지 미치면서, 막스 M. 바르부르크사도 큰 타격을 입는다. 독일 정부와 막스의 형 파울의 도움으로 바르부르크사는 위기를 넘기지만, 막스가 바르부르크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은 틀림없었다.

4. 망명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지도자로 선출되면서 독일에 반유대주의가 퍼지기 시작했다. 막스는 요주의 대상인 유대인으로 위협을 받으면서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지크문트는 히틀러의 위험성을 인정하면서도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나치가 약속한 사회혁명에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도 수년간 나치에게 현혹되었던 다른 이들에 비해, 지크문트는 비교적 빠른 1933년 초에 나치의 위험성을 깨닫고 독일을 떠날 것을 결심한다. 여러 나라를 모색한 끝에 그가 마침내 선택한 곳은 영국 런던이었다.

5. 적에게 맞서기 위한 거래
바르부르크가 사람들은 너무 늦기 전에 독일을 탈출한 덕에 아무도 살해당하지 않았다. 지크문트는 런던에 금융 중재사 뉴 트레이딩을 설립한다. 또 독일에서 탈출한 유대인이자, 이후 그의 중요한 파트너가 되는 헨리 그런펠드와 만난다. 그 밖에도 에리히 코너, 에르네스트 탈만과 같은 인물들과 만나 함께 뉴 트레이딩을 운영하게 된다. 1939년 영국에 귀화한 이후, 지크문트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영국 내에서 입지를 키워갔다.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도 지크문트는 뛰어난 정보 수집력과 직관력, 그리고 행동력으로 전쟁의 혼란을 오히려 기회로 바꾸며 결국 뉴 트레이딩을 영국 시장에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다.

6. 명성의 회복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의 패배로 막을 내렸지만, 나치의 아리안화 정책 떄문에 금융 가문으로서의 바르부르크가 역시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지크문트는 회사명을 뉴 트레이딩에서 자신의 머리글자를 딴 S.G.바르부르크로 개명하고 회사의 방향성을 금융회사에서 상업은행으로 변경한다. 전후의 척박한 금융계의 상황과, 뉴 트레이딩 시절부터 받아왔던 천대 속에서도 바르부르크는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회사를 성장시켜나갔다. 그리고 인수합병 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S.G.바르부르크를 상업은행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한다. 1950년대 들어 영국 경제가 번영을 맞이하면서, S.G.바르부르크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영국에서의 성공과 어머니의 죽음이 독일에 대한 애착을 조금 약화시키긴 했지만, 지크문트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영국과 독일의 화합을 꿈꾸었다.

7. 대서양 연합
과거 미국을 방문했던 지크문트는 미국의 상업은행인 쿤로브사에 깊은 관심을 보인 바 있다. 이때만 해도 유럽 통합을 지지하던 지크문트는 범대서양주의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영국의 유대가 깊어지고 1952년 쿤로브와 동업자 관계를 맺게 되면서, 지크문트 역시 미국에 대한 전략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크문트는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쿤로브의 개혁을 위해 애썼지만, 여러 가지 방해 요소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0년 뒤 동업자 직책을 사임한다. 그런데 1959년 영국 최초의 적대적 기업인수 사례로 알려진 ‘알루미늄 전쟁’에서 승리하여 브리티시알루미늄을 레이놀즈-튜브인베스트먼트 그룹이 인수하도록 함으로써 영국과 미국의 협력을 이끌고 영국 금융계의 스타가 되었다.

8. 유럽 통합의 기반
오랫동안 유럽 통합을 지지해온 지크문트였지만, 유럽경제공동체나 유럽석탄철강공동체와 같은 기관에는 환멸을 느꼈다. 정부 통제하에서 보호에 기반을 두는 질 낮은 경제 통합이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런던을 유럽 통합의 매개체이자 국제금융의 중심으로 되돌리기 위하여 유로본드 발행을 적극 추진했다. 하지만 유로본드 시장은 지크문트가 생각한 것처럼 유럽 통합으로 직접 연결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유로본드 시장은 유럽의 경제적 통합의 기반이 되었으며, 유럽 통합으로 가는 과정의 한 단계를 담당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9. 완벽함의 리듬
지크문트는 완벽주의자이자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덕분에 그의 회사 S.G.바르부르크의 직원들도 야근과 격무를 강요받기도 했다. S.G.바르부르크 투자부에서 근무하던 찰스 샤프는 바르부르크사의 이러한 분위기를 풍자하는 콩트를 여려 편 남겼다. 그의 콩트 속에서 바르부르크사의 경영진들은 밤낮 할 것 없이 일에 매달리고, 모든 문서는 철자 하나까지 완벽하다고 나온다. 또한 지크문트와 파트너 그런펠드는 늘 비관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 밖에도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는 지크문트의 별난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그래도 그는 ‘하이 파이낸셔’가 되기 위해 필요한 도덕성, 효율성, 연줄, 자본, 그리고 수준 높은 직원들까지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1970년대 들어 지크문트가 경영진에서 물러나면서 바르부르크사의 중심에는 그런펠드가 서게 되었지만, 그것은 지크문트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영향력이 바르부르크사를 넘어서 국가 전체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했다.

10. 영국의 금융 주치의
1960년대 영국 정치를 주도하였던 영국 수상 해럴드 윌슨은 영국 경제에 위기가 닥칠 것을 염려하던 지크문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크문트는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를 막는 것을 주요 원칙으로 영국 경제에 대한 조언자 역할을 했다. 이로써 지크문트는 기사 작위를 수여받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업무를 손에서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크문트의 조언에도 윌슨 내각은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를 막지 못했다. 60년대 말까지 파운드화에 대한 압박은 계속되었다. 지크문트는 기업 차원의 경영 합리화와 정부의 거시경제학적 정책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미시경제학적 노력을 시도했으나, 기업적인 성공만 이루었을 뿐 영국 경제의 부흥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70년대에 들어 더욱 악화되었고, 1974년 다시 총리로 취임한 윌슨의 정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지크문트 역시 지친 듯 정부의 일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11. 서구 세계의 해체
지크문트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통합, 그리고 나아가 미국과 캐나다의 통합을 통한 세계화를 추구했지만, 점차 그의 관심은 서구 세계 밖으로도 뻗어나갔다. 젊은 시절부터 시온주의와 관계가 멀었던 지크문트도 한때 이스라엘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1959년 짧은 기간 동안 이스라엘을 방문한 뒤 그 나라에 완전히 매료된 지크문트는 이스라엘의 경제 발전을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지크문트는 경제적 파트너로서의 이스라엘에 실망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 때문에 지크문트가 반시온주의자들의 표적이 되면서 바르부르크사가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결국 지크문트는 점차 이스라엘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 밖에도 지크문트는 미국과 일본을 꾸준히 지켜보며 세계경제의 흐름을 짚어냈다. 특히 자신과 비슷하게 금욕적인 성향을 지닌 일본에게 호감을 보였다.

12. 값비싼 교훈
지크문트의 아들인 조지 바르부르크는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쉽지 않은 인생을 보내야 했다. 1970년 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C.W.캐피탈이라는 이름의 회사를 세워 발전시킨 끝에 가문의 이름을 사용할 것을 허락받고 크립스바르부르크로 개명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회사인 S.G.바르부르크와의 관계는 순탄치 못했고, 결국 실수로 큰 손실을 입은 아들 조지를 지크문트는 도와주지 않는다. 결국 조지의 크립스바르부르크는 도산하고 만다. 이처럼 아들에게도 엄격했던 지크문트에게 자신의 회사인 S.G.바르부르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경영진에서 물러난 뒤에도 바르부르크의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지크문트는 회사명을 바꿀 것을 요구하거나, 지나친 성장을 자제하라고 하는 등 바르부르크사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바르부르크사의 확장과 현상 유지라는 모순된 목표를 동시에 품고 있었던 지크문트는 여러 기업들과 인수합병을 꾀하다가 실패하고 사업상 손실까지 겹쳐 위기를 맞기도 했다.

13. 성인 교육
1980년대에 접어든 이후에도 지크문트는 여전히 바르부르크사의 운영에 관여했다. 하지만 이미 나이를 먹은 그는 전과 같은 직관이나 판단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지크문트는 세계경제에 대해 부정적인 예측만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는 1982년 영국 런던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죽음 뒤에 화려한 장례식은 없었지만, 헌사의 물결은 넘쳐흘렀다. 각 신문들은 부고 기사를 통해 그의 업적을 찬양했고, 오랜 동료들도 그를 찾아와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바르부르크는 비록 금융가로서 생을 마쳤지만, 정치와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인물이었다.

지크문트의 사망 이후 바르부르크사는 발전을 거듭하였으나, 무모한 팽창 끝에 결국 몰락하고 만다.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요소는 수없이 많지만, 그중 가장 큰 요인은 지크문트가 강조했던 ‘현실 안주에 대한 경계’를 잊었기 때문이다. 현실에 안주한 나머지 ‘확장 도취’에 빠져버린 것이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지금, 격변의 지난 세기를 견뎌냈던 지크문트 바르부르크가 남긴 교훈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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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파이낸셔

저자
니얼 퍼거슨 지음
출판사
21세기북스 | 2011-05-09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경제학의 거장, 니얼 퍼거슨이 소개하는 금융인 바르부르크의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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