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이후, 중년의 재발견
오늘날은 ‘홀로살기’가 훨씬 쉬워졌다. 교통과 통신수단의 발달은 사람들이 꼭 어울려서 살아야 한다‘는 농경사회적 사고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오히려 더욱 다양한 통신수단으로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 혜택을 만끽하는 사람들은 여성들이다. 사회진출로의 욕구와 그녀들만의 원활하고 친화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오늘날과 딱 맞아 떨어져 ’그녀들의 세상‘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점점 고독하고 외로워하며 외톨이가 되어가는 사람들은 남자, 특히 중년에 접어든 남자들이다.
요즘 서점가에 중년바람이 거세다. 지난 해에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청춘 콘서트'를 필두로 한 청춘이 키워드였다면, 올해는 중년이다. 중년의 남성 독자를 위한 책으로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남자의 물건>, <중년수업> 등이 대표적인데, 제목 한 번 아저씨답다. 김난도 교수가 쓰고 있다는 중년을 위한 책 제목은 점입가경, <결리니까 중년이다>란다.
이러한 중년 바람의 시작은 '마흔'에 있다. 책들 대부분이 어떠한 유혹에도 미혹함이 없는 불혹을 맞아, 90세 수명까지의 후반부 인생에 대한 고민하는 중년들의 고민을 대신하고 있다.
'나는 동창회가 싫다. 월급, 몰고 다니는 자동차로 사는 수준을 판단하고 행복을 가늠하는 눈치들이 싫어서다. 회사에서는 어느 줄이 튼튼한 동아줄인지 잘 판단해서 줄서야 하고, 사는 순간 '상투 잡아 인생을 저당 잡힌 하우스푸어다. 나는 매주 금요일에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월요일에 회사에 나오지 않으면 로또가 된 줄 알아. 지중해에서 유람선 타고 있을 거야. 나 찾지 마." 로또를 가득 채워 두 장을 샀다. 그렇게 만원을 날렸다. '정말 로또 밖에 답이 없는가' 고민도 하지만, 다음 주면 나는 또 일주일의 꿈을 만원에 사고 있을 것이다. 밀린 주택담보 대출금 갚으려면, 대학을 앞둔 큰 딸 과외비대려면 나는 오늘도 일해야 한다. 나는 아프면 안되는 몸이다.'
책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한국경제신문)의 주인공 '나'의 이야기다. 저자인 이의수 목사는 불혹의 마흔도 흔들리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아울러 오늘의 마흔들이 많은 애환과 아픔을 겪고 있지만 아직 절반 이상이나 남아있는 인생의 당당한 주인공이기에 축복이라 여기고, 미래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남성사회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저자는 그동안 만난 마흔 남자들의 실제 내용을 바탕으로 15개의 스토리를 엮었다. 마치 내 얘기같은 스토리에 흠뻑 빠져 있다보면 어김없이 저자의 조언이 등장해 내 어깨를 어루만진다. 우선 '내, 네 맘 다 안다.' 위로하고, 곧이어 '아직 쇠털처럼 많이 남은 인생을 위해 힘내자'고 격려한다. 책장을 덮으니 후련한 마음이 든다. 저자에게 위안을 얻은 것이다. 그렇다. 마흔의 나는 지금, 위로받을 곳이 필요하다.
남자는 외로움에 익숙한 동물이다. '사냥을 도맡았던 성性’이라 제 몫을 챙기려 홀로 다녀야 하고, 사냥을 할 때도 침묵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과묵하다'는 말이 칭찬이 되었다. 생리학상 남자의 수염이 길게 자라는 이유가 과묵해기 때문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을 정도다. 특히 우리나라는 더 심하다. 말 많은 남자를 터부시해온 유교적 문화적 요인 때문에 ‘수다스러운 남자’는 꼴불견으로 여기고, ‘게이가 아니냐?’는 의심까지 사게 된다. 하지만 남자도 외로움을 탄다. 걱정이 생기면 고민을 나누고도 싶다. 문제는 어디 내놓고 하소연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우연히 친구와 만난 술자리에서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넋두리할라 치면 돌아오는 대답은 “너, 취했냐?” 혹은 “나, 돈 없다”, 늘 똑같다.
저자는 외로운 중년을 보내지 않으려면 우선 아내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행복한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성공적인 노후를 준비하려면, 서로의 자아를 인정하고 받아들어야 한다. 배우자의 성격, 생활습관, 사고방식 등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며 저자는 이렇게 충고 한다. "남성은 외롭다. 인생의 외로움을 벗어버리고 행복한 삶을 꿈꾼다면 나를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아내를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이다."
한편 심리학 교수 김정운은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쌤앤파커스)에서 외롭고 싶지 않다면 매일 감탄하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산꼭대기까지 죽어라 오르는 이유는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건강하려고 산을 오른다면 중간까지 왔다 갔다 하면 되지, 왜 그렇게 죽어라 하고 정상에까지 올라가는가? 산에 오르는 이유는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 아니고,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다. 감탄하기 위해서다. 산꼭대기에 올라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우와~!”하며 감탄하고 싶기 때문이다. (중략) 감탄은 이 숭고함과 장엄함의 구체적 반응이다. 말로 형언할 수 없고 개념화할 수 없으나, 삶의 가장 궁극적 경험이 우리에게 와 닿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감탄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감탄으로 양육한다. 감탄이 사라지는 순간,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시간 나는 대로 음악회도 열심히 가고, 미술관도 아내와 팔짱 끼고 가고, 축구장과 야구장에 아이들 손잡고 가는 이유도 '감탄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김정운은 <남자의 물건>(21세기북스)에서는 남자란 아이덴티티를 먹고 사는 동물이라고, 그래서 어떤 것이든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직함이 필요하고, 그 옆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매개해주는 물건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어령의 물건은 3 미터짜리 책상이고 신영복은 아버지의 벼루, 안성기는 스케치북을 '내 물건'이라 꺼내들었다. 김정운은 60개가 넘는 만년필, 아빠의 만년필이 좋았던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당신의 물건'은 무엇인가?
영화 <버킷 리스트>는 자동차 정비사였던 카터(모건 프리먼)은 죽음을 앞둔 암병동에서 만난 잘나가는 사업가 에드워드(잭 니콜슨) 함께 ‘나는 누구인가’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하고 싶던 일’을 다 해야겠다는 것! ‘버킷 리스트’를 실행하기 위해 두 사람은 병원을 뛰쳐나가 여행길에 오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살과 다름없다며 아내가 극구 반대하자 카터는 화가 나 큰 목소리로 말한다.
“난 지금 죽어가고 있어. 내가 두려울 것이 뭐야? 난 좋은 남편, 좋은 아빠로 평생을 살아왔어. 후회하진 않아. 하지만 이젠 ‘나’를 찾고 싶단 말이야.”
세렝게티에서 사냥하기, 문신하기, 카레이싱과 스카이다이빙, 눈물이 날 때까지 웃어 보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등 카터가 ‘나’로서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은 어쩌면 별 것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누구의 나’가 아니라 온전히 ‘나’로서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버킷 리스트’였다. 버킷 리스트는 살아가는 동안 지워나가야 할 '행복충전기‘이자 나만의 목표, 그리고 꿈이 된다. 봄이다. 따뜻한 봄볕 아래서 나의 행복한 중년을 위해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보자.
이 리뷰는 한국전력 사보 KEPKO TODAY (6호 - 4.10) '책의 향기' 에 실린 리뷰 입니다.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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