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콘텐츠가 아니라 큐레이션이 트렌드다!
기업이 생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소비자가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불황 운운하는 경제를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2000년대에 비해 무척이나 까탈스러워진 소비자를 말하자는 것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하던 30년 전 아날로그 시대의 소비자들을 상대로 기업이 사업하기는 시쳇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한 때 집 전화를 놓으려면 한국전력에 100만원의 보증금을 걸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전화회선이 부족한 때문이었다. 그 시절엔 기업이 제품을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제품을 알리는 방법도 간단했다. TV의 황금 시간대를 잡아 광고만 하면 됐다. 인터넷이 없던 세상은 획일적인 정보가 획일적으로 흘렀다. 제품이 부족하니 값은 당연히 비쌌다. 그래서 소위 ‘신제품’을 가진 사람은 자연히 ‘부자’처럼 보였다. ‘배가 나온 김사장‘이 복도 많아 보이던 그 시절, ’부자 같은 분위기‘는 권력이었다. 메르세데스 벤츠 등의 고가 수입차는 단순히 ‘자동차’가 아니라 ‘고가의 수입차를 타고 다니는 유명 인사’라는 사회적 의미가 덧칠해졌다고 보는 것, 이것이 기호소비다. 사람들은 TV 광고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도 많이 사는 것 같으니 나도 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지갑을 열었고, ‘회사 동료보다 조금이라도 좋은 물건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상점 앞에 줄을 섰다. 그 시절엔 희안하게도 비싸면 더 잘 팔렸다.
이러한 ‘과시적 기호 소비’는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21세기의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며 급격하게 생명력을 잃었다. 전과는 다르게 ‘수입차나 고급 차를 사는 것은 돈 낭비다. 자동차는 단지 이동 수단일 뿐, 경차면 충분하다’는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비단 자동차 뿐 아니다. 저렴한 가격에 실용성이 큰 유니클로(UNIQLO), 자라(ZARA) 등의 패스트패션(fast fashion)이 유행하고 있는 것은 소비자들이 ‘기능 소비’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소비의 변화는 소비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네티즌이라 불리는 지구촌 사람들과 다양한 정보와 경험을 나누다 보니 똑똑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정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 아니 그야말로 정보가 폭주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자 소비자들은 혼란스러워졌다. 현대인들은 폭주하는 정보 속에서 양질의 정보인지 알지 못한 채 휩쓸리게 되었고, 과도하게 전달되는 정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 가운데, 정보 그 자체의 가치만큼이나 정보를 필터링해주는 큐레이션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큐레이션의 시대>(민음사)는 텔레비전, 신문, 출판, 광고와 같은 매스 미디어의 영향력이 소멸하고, 트위터, 페이스북, 포스퀘어 등 사람과 사람의 연결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 오늘날, 넘쳐나는 정보들을 얼마나 잘 고르고 편집하는지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마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세계 곳곳의 다양한 예술 작품의 정보를 찾아 모으고, 이를 빌려 오거나 수집한 후 전체를 일관하는 의미를 부여해 기획전 등을 여는 일을 하는 큐레이터가 필요하듯 이제는 디지털 세계에서도 가치 있는 정보를 얻는 데에도 길라잡이가 필요한 것이다.
사사키 도시나오佐佐木俊常 는 <전자책의 충격> 등을 내면서 이미 일본에서 인터넷 사회론의 일인자로, 날카롭고 솔직한 비평으로 정평이 나 있는 저자 사시키 도시나오는 격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인터넷 사회에서 ‘정보’를 새롭게 들여다봤다. 정보가 곧 돈이 되는 지금, 그의 시선 속에서 디지털 시대의 블루오션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
“큐레이터라는 것은 본래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학예사(學藝士)‘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 곳곳에 있는 다양한 예술 작품의 정보를 찾아 모으고, 이를 빌려 오거나 수집한 후 전체를 일관하는 의미를 부여하여 기획전 등을 여는 일을 한다. 이는 무분별한 정보의 바다에서 특정한 콘텐츠를 기준으로 정보를 건져 올리고, 댓글과 같은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에서 유통시키는 행위와 굉장히 비슷한 맥락의 일이다. 그래서 큐레이터라는 말은 미술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은 ’정보를 다루는 존재‘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저자는 1차 정보를 발신하는 것보다도 그 정보가 가지고 있는 의미, 그 정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 그 정보가 가지고 있는 '당신에게만 필요한 가치'와 같은 콘텍스트를 부여할 수 있는 큐레이션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큐레이션을 하는 큐레이터는 따로 정해지지도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 페이스북 앱에 접속하여 새로 업데이트된 소식을 확인하는 우리, RSS 리더를 통해 받아 보는 뉴스를 살펴보고,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각종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구독하는 정보들을 탐독하고 그중에서 내게 유용한 정보를 ‘즐겨찾기’ 하거나 ‘북마크’ 하거나 댓글을 달거나 ‘좋아요’를 하는 등 일련의 활동을 통해 무수한 정보와 씨름하고 정보를 걸러내고 정보를 재배열하고 재가공하는 우리, 하루 종일 정보를 접하고 그에 대해 나름의 코멘트를 하며 데이터 생산을 하는 우리 자신이 바로 큐레이터다.
아닌게아니라 꿈보다 해몽이라 했던가. 크리에이터(예술가, 작가)가 꿈을 꿨다면(창작했다면), 해몽은 큐레이터의 몫이다. 문제는 세상을 여는 사람들이 큐레이터라는 점이다. 저자는 이를 '콘텍스트(context)의 힘'이라며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의 경계, 그리고 이런 경계를 설정한 큐레이션의 방향성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정보의 바다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광활한 정보의 바다에 특정한 콘텍스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큐레이션이다.“ 고 말했다.
그렇다면 큐레이션은 왜 필요할까? 큐레이션은 타인이 가진 관점(觀點, perspective)의 총체다. 즉, 타인이 어떤 방향에서, 혹은 어떤 가치관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은 세상을 보는 위치나 방향 뿐 아니라 그가 가진 사고(思考)를 포함한다. 우리는 그들의 독특한 시선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저자는 트위터에서 누군가를 팔로우하는 행위 역시 팔로우한 상대의 관점을 체크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신선하고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된다. 이 책에서 제시한 새로운 세상을 연 큐레이션의 사례는 다양하다.
비주류 음악인 월드 뮤직의 프로모터 일본인은 브라질 음악의 거장 에그베르토 지스몬티를 전세계에 알렸고, 이름 없는 노인 조지프 요아컴 낙서에서 새로운 예술을 발견한 작가 존 호프굿은 그의 낙서를 작품으로 승화시켜 그의 유작이 뉴욕의 유명한 미술관인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될 만큼 유명하게 만들었다. 재미있게도 정작 요아컴은 ‘내가 그림 그림에 가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술 취한 남자들의 배꼽잡는 영화<행 오버Hang over>와 영국의 코미디 걸작<뜨거운 녀석들Hot fuzz>도 자칫 수많은 영화 속에 뭍힐 뻔 했지만, 작품을 알아본 큐레이터의 손에 들려 세상에서 빛을 발했다. 독자의 참여를 통해 기성 언론을 뛰어넘은 인터넷 뉴스 매체로는 ’허핑턴 포스트(The Huffington Post)‘가 있다. 큐레이션의 새 지평을 보여주는 허핑턴 포스트의 순방문자수는 2011년 하반기에 ’뉴욕타임즈‘ 사이트를 앞지를 것으로 예측된다.
어느 미국인 블로거는 “콘텐츠가 왕이던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큐레이션이 왕이다.”라고 말했다. 큐레이션의 파급력은 신문이나 잡지 같은 미디어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기업은 일방통행 식으로 소비자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해 왔지만 이제는 큐레이트된 콘텐츠를 수용해야 할 뿐 아니라 소비자의 불만과 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제 소비자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온라인상에서 발언권을 얻은 커뮤니티의 한 구성원으로서 참여하고 협력해야 하는 존재로 떠올랐다. 델 컴퓨터의 고객 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품은 제프 자비스의 블로그나, 컴캐스트에 대한 가필드의 블로그 활동이 그에 관한 좋은 사례 들이다.
이 책은 글로벌 플랫폼 위에서 콘텐츠나 큐레이터,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는 팔로워 등의 소규모 모듈들이 존재하고, 이런 관계가 고정되어 잇지 않고 항상 재조합되며 신선한 정보를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그런 ‘큐레이션의 생태계’가 탄생했음을 전하고 있다.
과거에는 미디어의 대세가 블로그 였다면 오늘날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대세라고들 말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중요한 것은 앞으로 소셜 미디어를 축으로 하는 정보의 유통로가 어떻게 전체상을 만들어갈지를 그리는 비전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 비전을 제대로 인식하고 프레임워크 속에서 중장기적 전략을 가질 때 미래를 제대로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을 제대로 보고, 미래를 내다보고 보고 싶은가? 큐레이터가 돼라!
이 리뷰는 코오롱 그룹의 사보 KOLON(5월호) 북칼럼 <북소믈리에>에 실린 글입니다.
큐레이션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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