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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보이가 주목한 오늘의 책 -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

by Richboy 2015. 3. 12.

 

 

진정으로 행복한 사회의 경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 ‘관계성’과 ‘상호성’은 이기심 · 이타심에 앞선 사람의 본성
- 21세기 저성장·고실업의 새 해법을 제시하는 시민경제론


사회적 경제, 공유경제, 제3부문…. 최근 자본주의 경제의 난제를 돌파하려는 시도로서 각광받고 있는 영역에 붙여진 이름들이다.『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은 이런 시도를 한데 아우르며, ‘시민’을 주요 경제 주체로 끌어들여 새로운 경제의 장으로 초대한다. 시장과 사회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는 ‘시민경제’는 계약의 원칙과 상호성의 원칙, 부의 재분배가 조화롭게 작동하는 경제다.

시민경제학의 시각은 ‘자유시장-복지국가’ 모델이 부딪힌 저성장 ㆍ 고실업 문제에 새로운 해법을 내놓는다. 저자는 “모두에게 임금 노동의 형태로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개념은 순전한 유토피아적 발상이자 위험한 거짓말”이라며 “민간 부문에서 ‘해방된’ 노동력이 사적 시장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재화, 즉 관계재와 가치재를 생산하는 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를 쓴 협동조합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스테파노 자마니 교수의 신작(공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중세 가톨릭 전통에서부터 출발하는 경제학사, 사회학과 경제학을 넘나드는 풍성한 논의를 담아낸 대작이다.


 


시장과 사회, 성장과 분배, 거래와 증여 - 이 모든 이분법에서 벗어나라


주류 경제학은 모든 비효율의 해결책이 시장의 확대에 있다고 본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시장은 사회적 차원과는 별개의 동떨어진 것이며 기업은 비-사회적인 기구다. 주류 경제학의 반대쪽 끝에는 기업을 반-사회적인 기구로 보는 시각이 있다. 마르크스와 칼 폴라니가 그 대표 주자다. 칼 폴라니가 보기에 시장은 사회를 위협하면서 발전한다. 오늘날의 정치 담론은 이런 두 가지 경제적 시각으로 양극화하고 말았다. 한쪽은 시장을 정치적 문제의 해결 수단으로 떠받들고, 다른 한쪽은 시장을 필요악으로 치부한다. 이 책이 두 발을 딛고 선 시민경제학의 전통은 이 두 가지 시각과 완연히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시민경제학은 인간의 사회성과 상호성을 경제생활의 중심 요소로 바라본다. 사회성은 경제의 영역과 따로 떨어져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경제학은 개개인의 이익 추구와 사회성의 작동이 경제 활동 안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민경제학은 성장이냐 분배냐를 묻는 이분법 역시 넘어선다. 성장을 통한 소득 창출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국가가 사회적 역할을 맡아 부의 재분배를 이룬다는 2단계 논리가 더는 작동하지 않는 시대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포드에 좋은 것이 나라에도 좋은 것”이라는 말이 회자되었고, 그 말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유령이 되어 21세기 대한민국에까지 떠돌고 있다. 그러나 국가적 관점으로 국가와 기업, 시민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가능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 셋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시민경제에서는 성장과 분배가 하나의 통합된 경제 행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비로소 경제 행위는 사회 안에서 더불어 사는 시민의 손을 통해 벌어지는, 그 자체로 사회적 행위가 된다. 시민경제가 작동할 때,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는 질문은 더 필요하지 않다.

중세 인본주의 전통, 더 거슬러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시민경제의 기원을 찾다

시민경제의 사상적 기반인 시민 인본주의는 그리스 로마의 전통과 기독교, 그리고 자유도시가 낳은 새로운 정치 ㆍ 경제적 요구의 합성물이다. 이 사상의 황금기는 15세기 초반이고 그 지역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였다. 지금도 피렌체에서 화려한 건축물로 확인할 수 있는 도나텔로, 보티첼리, 안젤리코의 세계를 상상하면서 시민 인본주의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자유가 흘러넘치는 도시의 생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등 교부철학까지 면면히 이어 내려온 ‘시민 덕성’의 강조, 그리고 자치와 자율의 공화주의 정치는 시민 인본주의의 산물이었다. 시민 덕성은 도시 안에 자치적 질서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데 요구되는 덕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상호성의 코드를 내재하는 가치다.

이런 환경에서 시장이 발전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시민경제가 번성했다. 수도원은 ‘세속적 일상생활의 차원으로 이해되고 옮겨질 수 있는 경제적 태도의 규범’을 정식화하려는 기구로서 시민경제 실현의 첨병으로 활약했다. 가톨릭 사상과 긴밀히 결합된 시민경제의 전통에서는 무엇보다도 공동선(common good)의 원칙이 중요했다. 공동선의 원칙 아래서 수도사는 가난한 이들을 돕고 이들에게 돈을 빌려줄 의무가 있었으며, 이를 위해 수도원이 토지를 보유하는 것은 사유재산의 윤리적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유재산은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한에 있어서 정당하다”라고 한 말 또한 시민경제의 전통에 그 뿌리가 있다.

행복은 효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공리주의의 덫에서 벗어나 공공 행복의 확대를 지향하라


사회 밖에 행복은 없으며, 시민 덕성과 공공선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없다. 시민경제의 관점은 이 한 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시민경제학이 추구한 것은 부가 아니라 행복이며, 그것도 각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공공의 행복’이다. 개인의 행복은 단순히 그 총합으로써 공공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공 행복은 사적 이익의 총합도, ‘보이지 않는 손’을 거쳐 만들어지는 의도치 않은 결과도 아니기 때문이다. 공공 행복은 시민 덕성의 ‘보이는 손’을 거쳐 이뤄지는 경제 활동이 낳는 산물이다.

시민경제학은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산업화와 함께 부상한 공리주의 사상은 시민경제에 무엇보다 큰 타격을 입혔다. 공리주의에서 행복은 효용(공리)으로 축소되고, 공공 행복은 개인적 효용의 총합이 되었다. 공리주의의 선구자 벤담이 행복과 효용을 동일시하면서, 신고전파 경제학은 공공 행복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개인의 효용과 선호를 탐색하는 쪽으로 달음질쳤다. 공리주의의 그림자는 오늘날까지도 경제학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공리주의가 경제학을 점령하면서 일으킨 부작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결과주의다. 행위의 가치는 결과로써만 가늠된다. 둘째는 그 결과를 가늠하는 기준이 오로지 효용으로 수렴된다는 문제다. 결국 효용으로 전환되지 않는 요소, 이를테면 인간의 권리와 자유 같은 웰빙의 다른 측면들은 배제되고 만다. 마지막 부작용은 개인 효용의 단순한 총합이 그대로 전체의 효용으로 환산되어버리는 방식에서 생겨난다. 공리주의 원칙 아래서는 한 사람이 100만큼의 효용을 누리고 다른 한 사람이 0만큼의 효용을 누리는 상황과, 두 사람이 각각 50만큼의 효용을 누리는 상황이 동등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리고 공리주의가 득세하는 경제학에서는 전자의 상황을 후자의 상황에 가깝게 조정하려는 노력을 경제의 영역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시민경제는 경제 활동의 목적이 효용의 최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공 행복의 확대에 있다고 규정한다. 행복은 물질적 부(富)뿐만 아니라 자유의 함수이기도 하며, 이때의 자유는 소극적 의미로서 통용되는 ‘선택할 자유’를 뛰어넘는 적극적 의미의 자유다. 이런 시민경제의 관점이 최근 들어 새로이 주목받는 이유를 자마니와 브루니는 두 가지로 지적한다. 하나는 현대 경제 이론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환경 오염, 사회 불평등의 증가, 부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늘어나는 시민들의 불안감, 대인관계에서의 의미 상실, 정체성 충돌과 같은 세계 곳곳에 만연한 문제들에 대해서 공리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주류 경제학은 제대로 된 답을 내놓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두 번째로는 전통적인 복지국가 모델이 위기에 처하고 양질의 일자리 공급이 어려워지면서 현재까지 고수해온 성장 지향 모델이 지닌 근본적 한계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성장과 맞물린 고실업, 지금까지의 복지 처방은 모두 무용했다
완전 고용의 환상에서 벗어나라, 일과 일자리는 다르다!


오늘날 복지국가가 맞닥뜨리고 있는 재정상의 위기는 복지국가 자체의 무용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복지국가의 특정한 형태, 즉 국가 통제주의 모델의 부적합함을 보여줄 뿐이다. 애초에 복지국가를 가능케 한 가치 자체를 위협하는 것도 아니며, 복지국가가 민주적 ㆍ 시민적 진보를 최상위의 형태로 구현해낸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국가 통제주의 모델의 위기는 재정적인 것에만 있지 않다. 더 근본적으로, 국가 통제주의 모델이 자유와 평등을 조화롭게 구현하지 못한다는 데서 위기는 출발한다. 선진 사회 시민들은 이제 평등의 확대를 자유의 축소와 맞바꾸려 하지 않는다. 국가 통제주의 모델이 추구하는 온정주의적 방식은 수혜자의 기호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가 선심 쓰듯 베푸는 온정주의가 아니라, ‘품위 있는 사회’다. 시민들이 지닌 적극적 자유를 부인하면서 너그러운 혜택을 베풂으로써 사회 구성원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잔인한 사회적 배제는 경제적 소외다. 자신이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존재라는 인식은 착취당한다는 인식보다 훨씬 파괴적이다.

그렇다면 통제주의적 복지국가가 부적합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일의 본성에 일어난 심원한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일(work)이라는 활동은 일자리(job)라는 장소와 분리되었다. 우리 사회는 일을 한다는 것과 일자리를 갖는다는 것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곤 했지만, 일자리라는 개념은 2차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개념이다. 각 노동자에게 딱 맞는 자리를 찾아주는 것은 포드-테일러 시스템의 위대한 발명이었지만, 우리는 이제 또 다른 변곡점에 다다랐다. 탈-일자리(dejobbing), 즉 고정된 일자리의 종말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활동으로서의 일은 언제나 존재하겠지만, 일이 벌어지는 고정된 장소로서의 일자리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는 불안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고정된 일자리는 소외를 초래했지만 안정성은 주었다. 탈-일자리의 현상과 함께 우리는 끝없는 불안정성에 맞닥뜨리게 된다. 고용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가 언제나 겪어온 고질이었지만, 이제는 그 형태와 특성이 달라졌다.

두 저자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생산성 탓에 일자리에서 밀려나는 인력을 소비의 증가로 흡수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모두에게 임금 노동의 형태로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개념은 좋게 봐주어도 순전한 유토피아적 발상이며, 나쁘게 보자면 위험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민간 부문에서 ‘해방된’ 노동력이 사적 시장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재화, 즉 관계재와 가치재를 생산하는 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 자마니와 브루니의 생각이다.

일자리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져가는 사회에서 일자리를 갖지 못한 소수에게 혜택을 베풀어 다시 일자리를 얻도록 돕는다는 식의 복지 정책이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하다. 고용이 이루어지는 시장과 따로 떨어진 채, 시장에서 잠시 이탈한 자를 연대를 통해 돕는다는 생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시장과 연대는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더욱 그래야 한다. 시장이라는 기구 자체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목적을 위해서 활용될 수 있다. 이것이 시민경제학이 추구하는 새로운 복지 모델이다.

복지는 국가가 베푸는 자선이어서는 안 된다
시민의 선택권이 작동하는 ‘시민복지’ 모델을 구축하라


1980년대 이래 복지국가가 위기에 부딪히고 ‘사회적 경제(또는 제3부문)’가 부상하고 있는 데서 두 저자는 시민경제 복원의 희망을 읽는다. 위기 속에서 시민 인본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가 열릴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자마니와 브루니에게, 사회적 경제를 시장 기능이나 국가 기능의 보완물로 보는 견해는 신랄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사회적 경제를 아우르는 시민경제는 시장 옆에 존재하는 한 부문이 아니라 시장경제 총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마니와 브루니는 상호성의 원칙 아래 공동선을 추구하는 시장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회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 설명한다. 누누이 강조하듯이, 시장은 단순히 물건이 교환되는 장소가 아니며, 인간이 자기실현을 위해 서로 관계를 맺는 장소다. 특히 물적 생산성이 고도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더구나 행복이 물질(1인당 GDP)에 비례하지 않고 이스털린 패러독스가 작동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각종 사회 서비스를 포함하는 관계재(relational goods)가 점점 더 중요해진다. 따라서 국가가 시민들에게 제공되어야 할 물건과 서비스의 표준을 정해서 스스로 생산하거나 기업이 조달하게 하는 신국가주의(neo-statism)의 복지혼합(welfare mix)은 한계를 지닌다. 여기에서 사회적 경제 또는 제3부문은 국가가 정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전달하는 보충적인 자원에 불과하다.

저자들은 공공 행복이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정하고 생산해서 나누는 시민복지(civil welfare)를 통해서만 증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민복지는 이원화된 사회 모델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며 인간 본성에도, 시민경제의 전통에도 걸맞은 모델이다. 시민복지 모델은 기본적으로 보편주의적 인식에 기초한다. 여기서 국가는 필요한 사회적 서비스와 그 질적 수준을 규정하고, 그 서비스의 분배 규칙을 수립한다. 그러나 사회적 서비스를 직접적으로 생산하고 분배를 관리하는 임무는 국가가 아니라 시민경제 조직의 몫이다. 여기서 시민경제 조직은 국가의 복지 정책에서 적극적인 파트너로서 기능하게 된다.

 


책 속으로 추가

포드-테일러주의(Ford-Taylorism)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데 ‘중립적’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방법론 차원에서 순진함을 드러내는 명백한 사례다. (…) 포드주의가 가져온 노동의 구조적 ? 조직적 변화는 그에 못지않게 큰 소비 영역에서의 변화와 함께 나타났다. 조립 라인의 성공이 동반자로 맞은 것은 마찬가지로 성공을 누리던, 준비를 마친 과도한 소비주의였다. 그 결과 근대의 전형적 특징이 되어버린 노동과 소비의 이분화가 탄생했다. 이 안에서 노동의 주체는 소외되고 노동은 무의미해진다. 보상은 물질적 풍요뿐이다. _ 186쪽 20세기 경제학에서의 개인주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유를 보호하려면 제3의 기둥, 바로 시민사회가 필요하다. 열린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국가 범위 밖에 남아 있는 결사체들 안에서 우리의 삶이 펼쳐진다는 점이다.(다렌도르프) _ 196쪽 ‘국가와 시장’에 대한 사회 질서 모델 내에서의 제3부문

시민경제의 관점이 최근 들어 수면으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오늘날의 경제 프로세스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대 경제 이론 대부분이 지닌 환원주의적 성격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경제학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 경제 이론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를 괴롭히는 새로운 문제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몇 가지만 들면 환경 오염, 사회 불평등의 증가, 부가 늘었음에도 늘어나는 시민들의 불안감, 대인 관계에서의 의미 상실, 정체성 충돌의 대두 등이 있다. 두 번째는 전통적인 복지국가 모델이 위기에 처하고 양호한 노동의 보장이 어려워지면서 경제학자들이 현재의 성장 지향 모델이 지닌 심원한 특성에 대해 고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_ 210쪽 시민경제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다

중요한 사실은 서구 사회에서 사적 재화라는 경제적 범주(그 소비가 다른 이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 재화)는 서서히 지반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때보다 중요성이 커지는 재화의 범주는(상대적 의미에서) 공공재와 관계재다.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가 점점 익명성에 젖어들수록 개인이 사회적 인정을 받고자 자신의 정체성을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은 적어지기 때문이다. 고로 재화가 우리가 누구인지 타인에게 소통하기 위한 주된 수단이 되고 말았다. 내 이웃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인정받으려는 마음에 새 스포츠카를 집 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웃과 소통한다. 이 때문에 현대 사회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익명성, 사적인 것으로의 회귀 현상은 사적 재화의 소비를 늘리는 대신 사적 재화를 공공재로 변모시킨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전형적 모습이다. _ 217쪽 시민경제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다

일의 본성에 일어난 심원한 변화를 생각해보라. 일(work)이라는 활동은 일자리(job)라는 활동의 장소와 분리되었다. 오랫동안 일과 일자리는 같은 의미였다. 하지만 일자리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사회적 발명품이다. 2차 산업혁명에 와서야 일하는 활동이 일자리와 연계되었다. 각 노동자에게 작업 과정에서 딱 맞는 자리를 찾아주는 것은 포드-테일러 시스템의 위대한 발명이었다. … 현재의 과도기가 새로운 점은 우리가 두 번째 전환점에 다다랐다는 데 있다. 탈-일자리(dejobbing), 즉 고정된 일터는 종말을 맞았다. 활동으로서의 일이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의 전환은 적극적 자유의 측면에서 폭넓은 장을 열어준다. 그러나 불안정성이 내생하는 탓에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도 있다. 각자가 일종의 ‘일의 포트폴리오’를 관리하고, 일하는 삶 전체에 걸쳐 그 포트폴리오를 최적화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_ 220쪽 시민경제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다

보장해주어야 할 대상은 ‘아래에 있는 이’인가, ‘바깥에 있는 이’인가? 과거의 복지 모델은 ‘아래에 있는 이’만을 돌본다. 이를 위해 주로 누진세를 통한 소득 재분배가 수단으로 쓰인다. 오늘날은 이것으로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우리가 시민복지(civil welfare)라고 이름 붙이고자 하는 새로운 복지는 배제된 사람들을 향해야 한다. 노동 과정에서, 교육에서, 공동체의 참여 등에서 배제된 사람들. 우리의 관심을 사람의 생존의 권리에만 국한하는 것은 존엄의 권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시민복지가 추구하는 바는 사회 안에서 살아갈 권리다. _ 223쪽 시민경제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다
산업은 끊임없는 생산성 증가로 생겨난 가용 인력을 흡수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가용 인력은 두 가지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 실업 또는 저임금 일자리를 통해 잉여가 되어버린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아니면 노동 시간을 줄임으로써 필요한 일을 모든 주체에게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첫 번째 방식은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두 번째 방식은 충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사유재를 위한 시장의 규칙 안에 머물러 있어서는 생산성의 증가로 ‘해방된’ 사람들 모두에게 일을 줄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_ 296쪽 시민경제의 해결 방안

따라서 민간 부문에서 ‘해방된’ 일이, 사적 시장(사유재를 위한 시장)이 생산할 여력도 관심도 없는 재화를 생산하는 활동으로 흘러가도록 길을 내주어야 한다. 이런 재화가 바로 시민재화(civil goods)로, 등가교환의 논리를 적용할 수 없는 재화다. 관계재, 가치재, 일부 공공재, 공유지 등이 여기에 속한다. 등가교환의 원칙에 따라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활동만을 일로 규정하는 생각을 극복해야 한다. _ 296쪽 시민경제의 해결 방안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

저자
스테파노 자마니, 루이지노 브루니 지음
출판사
북돋움 | 2015-02-15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진정으로 행복한 사회의 경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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