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이는 만화책이나 학습만화만 읽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에요."
대중강연을 할 때 꼭 듣는 질문이에요. 열 번 강연을 하면 열 번 모두 같은 질문을 듣죠.
여러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요. 간신히 한글을 깨치게 하고 '이제 책을 잘 읽겠지' 하고 기대했더니, 만화책만 산처럼 쌓아놓고 읽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타겠어요. 그나마 학습만화라도 읽으면 다행이다 싶은데, 학습만화만 붙들고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다 읽었다고' 하면 그 역시 못마땅하겠죠.
하지만 전,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같은 대답을 해요.
"답답하겠지만 그냥 두세요. 정말 힘들겠지만, 책 잘 읽고 있다고 칭찬해 주세요. 그러다 보면 점점 글밥이 많은 책을 읽을 거예요."
그러면 절반 가량은 이렇게 다시 묻죠.
"아니, 옆집 아이는 그림 하나 없는 책을 술술 읽는다고 하는데.... 지켜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까지 만화로 가득한 책을 붙들고 있는 걸 봐야 하는 거예요?"
저의 마지막으로 이렇게 대답해요.
"아이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머지않아 변할 거예요. 변하는 건 틀림없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게임에 빠져 있는 것보다 만화책에 빠져 있는 게 훨씬 낫잖아요."
'아이에게 좋은 책을 읽히고 싶은 마음'은 모든 부모의 마음이에요. 하지만 이 마음이 '조급함'으로 바뀌면 아이와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해요.
십인십색(十人十色)이라고 했어요.
옆집 부모와 우리 부부가 다르듯 옆집 아이와 내 아이는 달라요. 옆집 아이가 글밥이 많은 책을 읽는 데는 책과 친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아이가 날 때부터 머리가 비상했거나, 어릴 때부터 매일 30분 이상 부모가 책을 읽어줬거나, 거실에 커다란 텔레비전 대신 서재로 꾸며져 있거나 같은 이유 말이에요.
'모든 불행의 시작은 비교하면서부터'라고 톨스토이가 말했어요.
옆집 아이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던 건, 사실 '부모의 조급함' 때문이었단 걸 먼저 이해해야 해요.
만화책을 보든 학습만화를 보든 내 아이가 지금 빠져 있다면 내 아이는 '책을 읽고 있는 중'인 거예요. 다른 때 같았으면 게임에 빠져 있거나 멍~하니 인터넷만 쳐다보고 있을 시간에 책을 읽고 있으니 얼마나 기특한 일이에요.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해 둬야 할 것이 있어요. '만화책이나 학습만화를 읽는 것도 엄연한 책 읽기'라는 점이에요.
미국 국어 교육 분야의 석학으로 잘 알려진 스티븐 크라센 박사가 쓴 <크라센의 읽기 혁명>이란 책이 있어요. 그는 이 책에서 '만화책과 읽기의 관계'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다뤘는데요, 만화책은 아이들의 읽기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글밥이 많은 책으로 넘어가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고 밝혔어요.
내 아이가 한글을 익혀서 글을 읽을 줄 안다고 해서 읽는 내용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읽을 뿐 무슨 뜻인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거죠. 8~9세 아이의 뇌가 읽으면서 이해할 만큼 자라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이를 해결해 주는 방법으로 부모님이 아이가 10살까지 책을 읽어주면 좋다고 했어요. 아이가 한 글자 한 글자 읽는 수고를 하지 않고 귀로 듣기만 하면 되니까요. 제 아이도 '해리포터'를 혼자 읽을 때는 재미없고 힘들다고 하더니 제가 책을 대신 읽어줬더니 정말 재미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읽어주는 걸 들으면서 상상만 하면 되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이 만화책을 읽고 학습만화를 읽는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만화로 읽으면 훨씬 더 재미있고 이해가 잘 되니까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아이가 '책을 펼쳐서 읽고 있다'는 거예요. 한 권, 두 권, 열 권짜리 시리즈를 읽고 이 과정을 계속 거치면서 아이는 '종이책도 게임만큼 재미있구나'하고 느끼는 거죠.
요즘 나오는 학습만화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어요.
아이들 한자 교육의 시작에는 '마법 천자문 시리즈'가 있고요, 세계사 교육의 시작에는 '먼 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와 같은 학습만화는 수십 년 동안 아이들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여러분도 잘 아실 거예요.
최근 몇 년 동안 학습만화 시장에도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채사장의 '지대넓얕 시리즈'가 어린이를 위해서 학습만화를 시리즈로 내고 있고요, 뇌과학자로 알려진 정재승 교수도 '인간 탐구 시리즈', '인류 탐구 시리즈' 등의 학습만화를 통해 아이들에게 뇌과학을 알리고, 인류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어요.
이렇게 유명한 작가들이 왜 학습만화를 쓰고 있을까요? 아이들이 빨리 알면 알수록 좋기 때문에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쉽고 재미있게 콘텐츠를 새롭게 만드는 거예요.
2010년 이후에 태어난 요즘 아이들을 일러 '알파세대'라고 불러요.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이 존재했던 세대, 영상을 보며 젖병을 빨고, 이유식을 먹은 세대들이죠. 이들에게는 영상이 활자보다 더 친숙한 세대예요. 영상과 활자, 그 가운데 역할을 하는 게 바로 만화책이고 학습만화예요.
책 읽기는 아이의 밥 먹기와 같아요. 아기가 태어나면 가장 먼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모유나 분유를 먹어요. 이가 없으니까요.
물로 된 영양 덩어리를 삼키기만 하면 밥을 먹은 거예요. 그다음은 이유식이에요. 잘게 부순 알갱기가 있는 죽이지만 여전히 굳이 씹지 않아도 되는 농축된 영양 덩어리예요. 이는 있지만 아직 잘 씹지 못하니까요. 이가 모두 생기고 잘 씹을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밥을 먹이죠. 조급한 마음에 아기에게 어른이 먹는 밥을 먹이지는 않잖아요? 부모는 아이가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지요.
책 읽기도 마찬가지예요.
글을 읽을 줄 안다고 해서 활자로 가득한 책을 줄줄 읽고 이해하진 못해요. 그림책이 모유나 분유였다면, 만화책과 학습만화는 이유식 같은 거예요. 설렁설렁 그림만 보는 것 같아도 아이는 엄연히 책을 읽고 있는 거예요.
수많은 독서가들이 책을 읽는 동안 만화책을 즐겨 읽다가 글밥이 많은 책으로 옮겨간 것처럼 머지않아 곧 아이들은 만화책에서 '00층 나무집 시리즈'나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 같은 책을 읽다가 점점 그림은 줄고 글자가 많아지는 책으로 옮겨갈 거예요. 이건 독서가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예요.
아이가 이빨이 나서 밥을 먹는 그날을 기다리듯, 그때까지 그저 응원하며 기다려주면 돼요. 조급하고 안타깝겠지만, 그래야 해요.
리치보이 - <행복한 부자 학교 아드 푸투룸 1, 2>의 저자,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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